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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를 찾아서] 송파구 홍보모델 오지윤 어린이...“제가 웃으면 행복하다고 하세요”
[스타를 찾아서] 송파구 홍보모델 오지윤 어린이...“제가 웃으면 행복하다고 하세요”
[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지난 3월 22일 송파구 성내천 물빛광장에서는 제30회 세계 물의 날을 맞아 “우리 아이들에게 푸른 지구를”이라는 주제로 행사를 가졌다. 그런데 행사에 참가한 환경단체 회원들과 구민들 그리고 기자들이 긴 머리를 무지개 고무줄로 땋아 내린 귀엽고 예쁜 소녀에게 시선을 뺏겼다. 오지윤 어린이가 물빛광장에서 진행된 '제30회 세계 물의 날'행사에서 창포꽃에 물을 주고 있다. (사진=최치선 기자) 제30회 세계 물의 날 행사에서 박성수 구청장과 함께 기념촬영 한 오지윤 어린이(좌측2번째)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주인공은 바로 오지윤 어린이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오지윤 양은 8살로 지난 2021년 10월 17일 송파구에서 제2회 ‘구민 홍보모델’로 선발된 23인 중 한 명이다. ‘구민 홍보모델’은 구의 다양한 정책과 소식을 홍보하는 송파구의 얼굴이다. 오지윤 어린이는 3살 때부터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 최연소 전수자로 매년 정기공연에 출연하고 있으며,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호 송파다리밟기 무동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송파산대놀이 공연후 엄마(왼쪽)와 함께 찍은 오지윤 어린이 송파다리밟기에서 무등을 타고 공연하고 있는 오지윤 (당시 6세) 어린이 오지윤 양은 노래와 춤 뿐만 아니라 재치있는 말솜씨로 주위의 귀여움을 독차지 한다. [스타를 찾아서] 진행을 위해 오지윤 양의 어머니 문소지 씨(46세)를 만나 딸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어 보았다. 제2회 송파구 홍보모델에 선발된 오지윤 양 (좌측에서 4번째)이 홍보보델들과 함께 카드섹션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지윤 어린이 오지윤 양이 송파구 홍보모델이 되었는데 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나요? “구 홍보모델은 지역행사에 초대되어서 구청장님이나 지역 어르신들과 함께 행사를 소개하거나 홍보를 하게 됩니다. 그밖에 지역 현안문제나 정책 등에 대한 퍼포먼스에도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성벽 준공식 무대에서 인사하고 있는 오지윤 어린이 오지윤 양의 어떤 점이 자랑스럽고 기쁜 지요? “제 딸이라서 당연히 예쁘고 귀여운데(웃음)...무엇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웃음이 많아서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햇살같은 아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윤이를 보고 행복바이러스라고 불러요. 처음엔 그냥 하는 칭찬이다 싶었는데 지윤이가 있으면 분위기가 행복해 지는 것을 느끼거든요.(웃음)” 풍납동토성동성벽공원 준공식 행사가 끝난 후 박성수 구청장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오지윤 어린이(좌에서 3번째) 오지윤 양이 춤과 노래도 잘한다고 들었는데 누구의 영향이 큰가요? “어려서부터 지윤이는 끼가 많았어요. 춤이나 노래 특히 뮤지컬 같은 것을 보면 금방 따라하고 그랬거든요.” 송파둘레길 지킴이 발대식에서 축하노래를 부르는 오지윤 어린이 좋아하는 취미나 관심이 있는 분야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지윤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 관심이 많아요. 길을 가다가도 비둘기와 대화를 하기도 하고 고양이, 강아지 심지어 돌맹이하고도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갑니다. 또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즉석 랩으로 만들어서 부르기도 해요. 요즘에는 어릴적 봤던 영화‘사운드 오브 뮤직’의 탭댄스 장면을 기억하곤 탭댄스를 추기도 합니다. 지윤이의 장래 희망은 너무 다양해서 아직은 모르겠어요. 하루는 의사였다가 다음 날에는 선생님으로 바뀌고 그 다음에는 경찰, 가수, 개그맨, 아나운서 등 등 계속 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웃음)” 3살때 우리나라 최연소 전수자가 되어 송파다리밟기 공연을 하고 있는 오지윤 어린이 앞으로 지윤이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은지 엄마로서 갖는 기대도 함께 말씀해 주세요. “네, 저는 우리 지윤이가 지금처럼 밝고 예쁘게 주위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꼭 하고 싶은 일은 포기하지말고 성취하는 사람이 되고 불우한 친구와 이웃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모든 엄마의 마음이지만 딸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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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노동법의 전문가로 꿈 이룬 이기섭 노무사
[인터뷰] 노동법의 전문가로 꿈 이룬 이기섭 노무사
[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임금체불이나 산업재해, 부당해고 또는 징계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대기업조차도 위와 같은 문제를 놓고 노·사간의 입장차가 커서 대규모 시위로 번지는 경우가 많다. (이기섭 노무법인 KOREAIN 대표) 그런데 노조가 없는 중소기업이나 5인 이하 개인 사업장의 경우 직원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더욱 심각할 수 있다. 이렇게 노·사간 갈등이나 문제로 인해서 법적 다툼을 벌일 때 외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 노무사는 바로 노동법의 전문가로서 직장인의 부당한 처우를 공명정대하게 판정 받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기섭 노무사(노무법인 KOREAIN 대표)를 통해 직업으로서 노무사의 매력과 보람 그리고 개인적인 꿈과 앞으로 계획 등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공인노무사가 하는 일은 노동위원회 구제신청(개별 근로자에 대한 부당해고·징계·전직·감봉 등) 대리업무, 산업재해 신청 대리업무, 임금체불 진정 및 대리업무, 체당금 신청 및 대리업무 등을 의뢰 받아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 대표는 노무사의 역할에 대해서 한마디로 “개인 또는 회사의 노동법전문가”라고 말한다. 이 대표의 어릴적 꿈은 판검사였다고 한다. “제 초등학생 때 생활기록부 꿈은 판검사였습니다. 전주고등학교를 입학하여 이과를 선택했다가 어릴적 꿈이 떠올라 서울에서 재수(再修)하면서 과를 변경하여 법대를 입학했습니다. 이후 사법고시에 도전했으나 고배(苦杯)를 들고 낙오자처럼 느껴졌던 차에, 대기업 법무팀 선배님께서 노동법에 관해서는 노무사가 전문가라고 추천해 주셨습니다. 어릴적 ‘법률전문가가 되어 사람들의 다툼을 공명정대하게 판정’해 주고 싶었던 꿈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은 설레임이 들었습니다.” 이 대표는 노무사가 된 동기에 대해 말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판검사 대신 노무사가 된 게 만족스럽고 보람있게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그 이유를 묻자 이 대표는 웃으면서 덤덤히 자신의 경험담을 소환해주었다. “어릴적 꿈과 노무사가 된 동기의 연장선으로서 노무사로서 보람은 노동사건을 공명정대하게 판정받아 사업주나 근로자가 억울함을 해소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이나 처분을 받는 것입니다. 첫 사건은 연장, 야간, 휴일근무 시간외수당 청구였습니다. 방대한 자료의 정리로 한달간 하루도 못쉬고, 사업주의 협박과 욕설을 견디며, 고용노동부의 담당자가 세 번이나 변경됐었습니다. 그럼에도 고용노동부에서는 불인정 취지로 검찰에 송치했는데, 검찰청에 주말에도 출근해서 소명한 끝에 2천여만원의 시간외수당과 사업주 형사처벌을 이끌어 냈습니다. 가장 보람됐던 사건은 계약직으로 입사하여 2년뒤 계약만료로 퇴사한 근로자분의 부당해고를 구제해 드린 사건입니다. 기간제 계약기간 2년을 초과한 법위반 부분을 밝히려 회사의 과거 채용이력과 교육일정 및 내용을 전부 조사하였고, 결국 근무기간을 추가로 인정받아 부당해고 판정을 이끌어 냈습니다. 의뢰인은 세자녀와 아파서 누워있는 남편을 뒷바라지 해야했던 여성 가장이셨는데, 한가정의 생계를 유지시켜드렸다는 보람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반면, 경영상 어려움이 있는 회사 사업주의 입장에서도 근로자들의 월급, 퇴직금을 지급하지 못하여 가족들과 도피 생활하는 경우 고용노동부에서 체불임금을 해결 해 줌으로써 근로자들이 사업주의 형사처벌을 면하게 도와주는 간접적 역할도 합니다. 2019년 7월 16일부터는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관련으로 조사위원, 심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조사하면서 피해자의 아픔과 더불어 가해자가 그렇게 행위한 원인까지 파악하고 도움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해자 또한 다른 누군가에 의한 피해자인 경우도 있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노무법인 KOREAIN 직원들 단체 사진 이 대표는 “노동자와 사업자 양쪽의 입장을 경청하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대표집무실 창틀에 세워져 있는 수십 종의 상장과 감사장 그리고 위촉장 등이 눈에 들어와서 이 대표에게 물어봤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노사의 대립적인 관계를 벗어나 협력적 노사관계의 형성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사)갈등해결센터 갈등조정전문가 5기(회장) 수료 및 갈등관리사1급 자격을 취득했고, 한국공인노무사회 노사협의회 컨설턴트 1기(회장) 수료해 삼성인재개발원에서 노사협상 강의 및 코칭을 진행했습니다. 올해는 고용노동부에서 진행한 노사전문가과정 1기에서 서울지방고용노동청장님, 중앙노동위 위원장님 등과 더불어 강사로 활동했습니다.” 이 대표에게 직업으로서 노무사에 점수를 준다면 몇점을 주고 싶은지 물어봤다. “최근에는 법무법인의 고용노동부 점검대응 컨설팅 및 노동법 자문이 증가하고 있는데, 노동법에있어 법률이나 실무적인 부분에서는 노무사가 최고 전문자격사임을 자부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근로계약서의 작성, 연차휴가, 취업규칙, 법정의무교육, 급여대장, 고용지원금, 4대보험 신고 및 보험료등을 적법하게 관리하고 비용절감도 해줌으로써 노동부 점검 이후에도 지속적인 법률자문으로 이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노무사로서의 보람과 노동법률전문가로서의 점수는 업무를 지속할수록 , 시대가 변화되면서 더욱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합격시점의 기쁨을 100점 기준으로 한다면 현재는 200점, 향후는 500점, 1000점이 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됩니다.” 노무사는 노사 양쪽의 입장에 서야 하기 때문에 포청천과 같은 공명정대한 판결을 이끌어 내기 위해 누구보다 냉정한 판단과 직관력이 필요해 보였다. 과연 어떤 성격이 노무사에 맞을까 궁금했다. “사업주나 근로자 어느 한쪽의 입장에서 대리하는 노동사건은 법적다툼 이외에도 당사자간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 쌓여있는 감정의 문제가 더 큽니다. 고용노동부 출석조사에서도 당사자간 고성과 욕설이 난무하고 법정처럼 제지할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이 제한적이어서 담당 공무원인 감독관님들도 고충이 많습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노무사의 성격은 남의 말을 잘 경청하는 인내력과 많은 내용을 조절하고 정리하는 꼼꼼함, 의뢰인의 정당한 보상과 상대방의 합의점을 찾는 협상력, 금전보상 뿐 아니라 다양한 합의방법을 찾는 창의성, 양당사자 사이에서 상처받은 감정을 추슬러주는 따듯함도 필요합니다.” 서울과 경기 뿐 아니라 충청도와 전라도, 부산까지 의뢰가 들어오면 출장을 나갈 정도로 바빠서 자기 개발에 투자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는데 추측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 대표는 자기개발을 위해 가정에서, 회사에서, 사회에서 기여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 “체력적으로는 헬스를 20여년간 해왔는데 코로나로 인해서 2년가까이 못가고 있어서 홈트레이닝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독서도 꾸준히 하고 있는데, 사업의 철학, 돈보다 운을 벌어라, 모티베이터 등 삶과 사업에 동기를 부여하고 올바른 행동양식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사업모임에서도 다양한 분야의 여러 대표님들에게도 인생과 사업의 경험에 대해 듣고 있습니다.” 반듯한 모범생 이미지의 이 대표에게 인생의 멘토가 있다면 누구인지 물어봤을 때 이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모님이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과유불급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몇십년을 항상 새벽에 기상하셔서 서면업무를 보시고 출근하셨습니다. 저에게도 입버릇처럼 늘 자신의 주제를 알고 넘치게 행동하지 마라고 당부하셨고 어머니는 아버지 내조를 잘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돌아가신 후 주위사람들이 어머니에게 아버지 칭잔과 함께 잘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자라는 동안 부모님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았고 그것이 제 몸에 그대로 스며든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은 부모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마다 여행을 갈 정도로 여행마니아인 이 대표도 코로나19로 나가지 못해 힘들었다고 한다. 이제는 위드코로나 시대로 상황이 바뀌었고 세계의 빗장이 조금씩 열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에게 추천하고 싶은 여행지와 새해 가고 싶은 곳을 물어봤다. 이 대표는 ”추천하고 싶은 여행지는 ‘보라카이’이고 새해 가고 싶은 곳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입니다“고 말한다. 이유를 묻자 ”보라카이는 어학연수로 다녀왔고, 그 후로도 4번을 더 다녀올 정도로 고향같은 곳입니다. 보라카이 화이트비치는 수심이 얕아서 아이들도 마음놓고 수영할 수 있는 안전하고 아름다운 해변이 입니다. 작은 섬이기 때문에 제가 직접 가이드도 하고 그럽니다. 이탈리아는 로마유적과 유물이 많아서 아내가 좋아하고 스페인은 가우디의 건축물과 투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꼭 가보고 싶습니다.“ 고등학교때까지 그림을 그렸다는 이 대표는 자신의 꿈을 위해 재수를 거쳐 서울 동국대 법대에 입학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다 노무사로 방향을 전환해 지금까지 노동법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어봤다. ”외연의 확대와 내면의 깊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업도 능력의 범위에서 좀 더 확장하고 싶고, 노사협의회 활성화 강의를 통한 ‘협력적 노사관계’ 전파로 기업의 경쟁력 및 근로자의 근로조건 향상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또한 직장내괴롭힘방지 강의 및 조사등 확산으로 행복한 일터 만들기 등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기존의 교육과 강의로 얻어온 제 경험을 더욱 발전시켜서 노사관계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이 대표와의 인터뷰는 글쓰기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글쓰기와 그림은 제 마음속에 꿈으로 남아있습니다. 은퇴 후에는 자전적인 글과 이를 담아내는 그림으로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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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송파구  박성희 위원장 “송파산대놀이 글로벌문화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구청장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인터뷰] 송파구 박성희 위원장 “송파산대놀이 글로벌문화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구청장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트래블아이=문소지 기자] 입추가 지나고 더위가 한풀 꺾인 8월 20일 송파구의회에서 행정교육위원회 박성희 위원장(더불어민주당)을 만나 송파산대놀이와 풍납동 토성 보존 노력 등에 대해 의견을 들어 보았다. 박성희 위원장 (사진=송파구의회 홍보팀) 먼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49호인 송파산대놀이에 대한 송파구의 지원은 어느정도 이루어지고 있는지, 문화재 보호사업에 문제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조례가 없어서 지원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2년전 제가 조례를 만들었지요. 하지만 국가중요무형문화재라서 정부와 서울시 그리고 송파구가 다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원책을 강구해야 되는데 오히려 방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지원이나 예산책정에 있어서 서로 미루는 입장인 것 같아 안타까워요. 현재 지원은 이병옥 회장 전수자만 월정액이 지급됩니다. 나머지 수십명의 전수자들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며 송파산대놀이에 참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연습할 수도 없고 충분한 기량을 쌓는데 턱없이 부족합니다.” 박성희 위원장 (사진=최치선 기자) 박 위원장은 송파산대놀이가 송파구의 자랑임에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모습에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송파산대놀이는 국가가 지정한 무형문화재입니다. 송파라는 지역명이 붙어서 송파산대놀이는 송파구가 세계에 자랑할만한 유산인데도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홍보도 제대로 안되어 있고 지원도 미미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하회탈춤보다 송파산대놀이가 훨씬 규모도 크고 다양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잘 보존발전한다면 외국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박 위원장은 계속해서 송파산대놀이가 글로벌 문화로 우뚝 설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물론 송파구청과 서울시 그리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전제로 한다. 박 위원장은 송파산대놀이에 지원하고자 예산을 책정하고 싶어도 역부족이었다며 단발성 지원보다 정기적으로 지원하는 기구가 발족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파산대놀이는 단체장의 의지와 결단이 있어야 빛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체계적인 조직과 예산이 편성될 것입니다. 물론 서울시와 정부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두번째로 풍납동 토성에 대한 송파구의 보호조치와 백제권역 개발에 대한 의지는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지난 2015년 문화재청은 풍납동 토성에 대해 6개 권역구분이 이루어져 권역별 보존대책을 수립했습니다. 풍납동 토성 내부 중 1권역은 이미 매입 완료되어 사적 지정이 된 구역이며, 2권역은 성벽 및 왕궁터 등 핵심지역으로 보상 후 이주대상입니다. 3권역은 백제문화층 유존지역으로 거주가 가능해 주민들의 정주성 향상 대상이며, 4권역은 고층아파트 조성으로 백제문화층이 유실된 지역입니다. 5권역은 풍납동 토성의 외부 지역 중 토성 인접지역으로 대부분 풍납동이나 강동구 천호동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6권역은 풍납동을 벗어난 도성 범위 포함지역이므로 인근 강동구 성내동 및 천호동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위원장이 송파구 현안문제를 담당자와 얘기하고 있다 (사진=송파구 의회 홍보팀) 이렇게 박 위원장은 송파구에서 풍납토성에 대한 보존과 지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1권역의 경우 지속적인 보수정비사업을 하고 있으며 2권역에 포함된 삼표 시멘트 공장을 조기 이전시킬 목적으로 현재 인도 소송 중에 있다. 여기에 매년 1천억원의 보상예산을 투입해 핵심지역인 2권역의 주택을 보상 후 철거하여 복원 정비 중에 있다. 3권역은 주민들의 정주성 향상을 위해 역사문화 특화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고 오는 2025년까지 서울시 마중물 사업비 200억원을 투입해 주민과 백제 한성기 문화재가 풍납동 토성이 되도록 할 예정이다. “제 고향이 부여입니다. 송파-부여-공주-익산을 연결하는 백제문화권 개발에 대해 협각 지자체에서 협의 중입니다. 부여의 경우 제가 부여군의회 의장과 백제문화 공동 개발 등에 대해 논의 했고 긍정적인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박 위원장은 “앞으로 백제문화권 개발은 자매결연 추진중인 부여-공주-익산 등과 함께 보다 큰 규모로 이루어질 전망이다”고 밝혔다. 다음은 박 위원장에게 행정위원장으로서 송파구 발전을 위해 한 일 중 기억에 남는 게 무엇인지 물어봤다. “탄천유수지에 다목적 체육시설을 조성한 것입니다. 기존에는 운동시설이 열악했고 오직 사람들이 운동할 수 있는 공간만 있었지요. 그 곳에 족구장, 게이트볼 장, 다목적 체육시설, 축구장 등을 만들고 운동시설을 설치했습니다. 송파구민의 건강을 위해서 마련된 송파구 전용 시설입니다.” 박 위원장은 송파구는 외부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송파구민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체육시설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탄천유수지를 개발해 다목적 체육공간과 시설을 설치하고 많은 구민들이 수시로 이용하게 만들었다. “잠실운동장이나 올림픽공원 등은 서울시에 등록되어서 허가를 받아야 이용이 가능합니다. 나머지 문화공간도 실상은 비슷합니다. 그래서 제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죠.” 박 위원장은 탄천유수지를 구민들의 휴식공간이자 체육시설로 바뀐 것은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했다고 말한다. 네번째 질문으로 송파구 작은도서관에 대한 실태를 물어보았다. “송파구는 청소년을 위한 공간이 부족합니다. 구에는 사립도서관을 포함해 총 42개의 도서관이 있습니다. 제가 한 일은 송도연(송파구도서관연합회)에 예산 3600만원을 지원한 것과 멘토링 교육, 2022년 지원센터를 운영토록 도움을 준 것입니다.” 박 위원장은 작은도서관과 연계해 골목서점도 지원할 예정이다. “골목서점이 대형서점에 밀려 맥을 못추고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제가 골목서점 조례를 추진했으나 불발되고 말았어요. 하반기에 다시 추진할 것입니다.” 끝으로 행정위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우리구의 주차난이 심각합니다. 주차공간 확보를 위해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새로 만들어지는 복지회관에 주차장을 포함해 구민들의 휴식공간을 넣으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재 임기 동안 골목서점 조례를 만들고 싶습니다.” 박 위원장은 인터뷰를 마친 후 코로나19로 고생하는 주민들과 자영업자들에게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응원의 한마디를 했다. “구민 여러분, 자영업자 여러분 힘 내십시오. 코로나19는 여러분의 의지를 이기를 수 없습니다. 조금 더 버티고 힘내면 곧 사라진 일상이 찾아오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성희 행정위원회 위원장 (현)위례시민연대 자치분권 특별위원장 제276회 임시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새마을지도자 송파구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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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송파구 윤영한 의원...주민 건강권 보장 실현 위해 삼표레미콘 이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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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아이=글·사진 문소지 기자] 백제인의 중심지였던 풍납동 토성 앞에서 윤영한 송파구 의원(풍납동, 잠실4동, 잠실6동)을 만났다. 비가 온 후 햇살이 비치는 풍납동 토성은 더욱 선명한 연초록색이어서 시야가 확 트이는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송파구 윤영한 의원이 풍납동 토성(뒤)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윤 의원은 급히 의회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인터뷰 전 양해를 구했다. 결국 준비한 질문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을 추려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다음은 윤 의원과 일문일답 전문이다.) 먼저 풍납동 토성의 유네스코 등재에 대한 윤 의원의 생각이 궁금했다. “풍납토성은 백제 700년 역사가 시작된 공간이자 전성기의 중심무대로 둘레 3.7km 이르는 한반도에 현존하는 토성 중 최대 규모로 백제 한성기의 유적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풍납토성은 보상과 이주, 철거, 복원 등 여전히 문화재 보존과 주민의 재산권 보호라는 가치가 대립하고 있으며 해결이 쉽지 않은 많은 현안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풍납동은 문화재 보존이라는 명목 아래 사실상 지역개발이 멈춘 상태이며 보상주택 철거로 인한 지역슬럼화, 인구감소 등 주거환경은 날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지정에 일단은 반대하지만 유네스코 지정에 앞서 보상, 이주, 주거환경개선, 개발의 마스터플랜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윤 의원은 풍납동이 왕궁터가 아니라는 주민들 주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한강물이 수시로 넘치는 지형에 왕궁을 짖겠는가? 도자기, 토기 유구와 유물이 대량으로 나온 이유는 왕궁터 여서가 아니라 저지대로 한강물이 넘쳐 질흙이 우수하기에 도자기를 만드는 집단 도요지였고 한강을 이용한 교역지 였다고 추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10년 이상 발굴했지만 아직까지도 왕궁터란 결정적 증거는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윤 의원은 사적지에 신청된 건축물 철거 후에 현재는 소규모 주차장이나 공원을 조성해 놓았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대규모 건축을 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건축업자들이 그 부지를 매수 할 수 있는 법적인 제도가 마련돼야 풍납동 주거환경이 개선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풍납동 토성에 대해 윤 의원은 할말이 많은 듯 보였지만 시간이 없어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송파구의 취약계층에 대한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이나 지원은 무엇입니까? “취약계층 돕기는 말로만 해서는 효과가 없습니다. 차상위 계층이나 기초생활수급자 같이 어느정도 드러난 취약계층은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분들은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을 발굴해 지원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정부나 지자체가 인력부족으로 하지 못한다면 야쿠르트 방문판매원(일명 아쿠르트 아줌마)과 같이 직접 대면할 수 있는 분들이 공조하면 좋겠습니다. 즉, 배달된 제품이 계속 쌓이거나 각종 고지서가 그대로 있다면 벨을 눌러서 사람의 유무를 확인하고 이상이 느껴지면 가까운 주민센터나 119에 신고해야 합니다. 또한 현재 송파구에서 하고 있는 '우리동네돌봄단' 활동도 송파구 전역으로 확대하면 좀 더 많은 취약계층을 발굴할 수 있다고 봅니다. ” 마스크를 쓴 윤영한 의원이 풍납동 토성을 가리키며 얘기하고 있다. 세 번째로 도농간 일자리 교류에 대한 효과와 내용은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농촌지역 일손부족과 도시지역 실업자 증가에 따른 도농간 일자리 교류가 필요합니다. 대도시는 청년뿐만 아니라 여성과 중장년의 일자리부족으로 구직난을 겪고 있지만 반대로 농촌은 갈수록 일손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고령화도 함께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도농일자리교류사업은 귀농이나 귀촌을 계획하고 있는 구민들에게는 현실적인 농촌의 삶을 경험하게 해줄뿐만 아니라 귀농생활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또한 당장 일자리가 필요한 구민들에게는 더 많은 일자리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손이 부족한 농민에게는 보다 풍부한 노동력을 확보하게 해줌으로써 안정적인 농가경영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도농간 일자리교류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노동의 욕구는 있으나 일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노동의 수요층을 발굴해 신체검사와 노동가능 여부를 확인한 후 실비를 받고 통근버스를 운행해 교류농촌지역으로 출·퇴근 시키는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송파구 윤영한 의원이 풍납동 토성 앞에서 촬영하고 있다. 현재 관심있는 사안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문화재입니다. 정부는 문화재발굴이나 보존에만 집중해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민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습니다. 가장 우선되야 할 것은 구민들에 대한 거주지 이전대책과 피해보상문제 그리고 주거환경 개선 입니다. 또한 유네스코 지정시 주민들에게 돌아갈 혜택이 무엇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합니다. 단순한 발굴이나 지정보다는 외국의 사례처럼 지역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생의 구조가 아쉽습니다.” 풍납동 토성 풍경 의원으로서 그동안 하신 여러 가지 일들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조심스럽지만 제가 지난 2005년부터 최근까지 약 17년 동안 삼표레미콘 이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활동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삼표 레미콘은 공장에서 발생하는 비산먼지, 소음, 매연 등 각종 환경오염으로 인해 주민 건강과 생활불편이 가중되었으며 레미콘 차량으로 인해 아이들의 보행 안전도 우려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제가 오래전부터 국민건강권을 침해하고 있는 (주)삼표풍납공장의 조기 이전 대책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삼표측에서는 2003년부터 진행해 오던 연차별 보상을 2014년에 갑자기 납득하기 어려운 조건을 내세워 거부했습니다. 이에 송파구, 서울시, 문화재청은 삼표공장 부지 강제수용을 위한 사업인정고시를 신청하였으며 2016년 국토부 승인을 통해 사업인정고시가 이루어졌습니다. 삼표측은 국토부를 상대로 사업인정고시 취소소송을 제기하여 상고심까지 다투었고 마침내 지난 해 2월 28일 대법원은 사업인정고시가 위법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만약 풍납동토성이 유네스코에 등재된다면 어떻게 개발할 것인지도 큰 관심사입니다. 현재 풍납동과 유사한 지역의 성공사례를 보면 화성과 전주 한옥마을이 있습니다. 그중 전주 한옥마을은 다양한 체험시설을 늘리고 실개천을 놓아 한 해 일천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가는 국제적인 문화관광명소가 되었고 세계적인 여행안내서가 선정한 ‘1년 안에 가봐야 할 아시아 10대 명소’에 선정 될 정도입니다. 사적지 지정으로 많은 불이익을 겪고 있는 풍납동도 이런 지역들을 모델로 삼아 역사성을 담은 콘텐츠 개발을 통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관광마을로 재탄생되길 기대해봅니다. 끝으로 송파구민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면? 송파구 발전과 송파구민의 건강과 보다 나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언제나 현장에서 민원해결의 답을 찾겠습니다. 또한 구민과 끊임없이 소통해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는 의원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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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병수 울릉군수...하늘이 숨겨놓은 보물섬 울릉도, '친환경생태관광' 구축
[인터뷰] 김병수 울릉군수...하늘이 숨겨놓은 보물섬 울릉도, '친환경생태관광' 구축
[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2018년 7월 1일 제45대 민선 7기 경상북도 울릉군수로 취임한 김병수 군수는 14년 정치 경력과 30년 경력의 행정가답게 울릉군민의 염원을 실천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김병수 울릉군수 (사진=민동근 작가 ⓒ트래블아이) 특히 코로나19의 전국확산으로 1일 확진자수가 1000명을 웃도는 상황에서도 울릉도는 철벽방역을 통해 확진자 제로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코로나 청정지역을 만든 김병수 울릉군수를 12월 11일 울릉군청에서 만났다. (다음은 김병수 군수와 일문일답 내용 전문) 김병수 울릉군수 (사진=민동근 작가ⓒ트래블아이) 먼저 울릉공항건설 확정, 울릉도 섬 일주도로 확장 및 완전개통, 선형개량, 울릉군 예산 최초 2천억 원 확보 등의 성과를 거뒀는데 이처럼 많은 일을 하게 된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궁금했다. “동해의 빛나는 보석 같은 섬 ‘울릉도’, 그리고 그 안에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울릉군민의 밝은 미래를 꿈꾸면서 1만여 군민과 함께 힘차게 달려 왔습니다. 지난 2년 반 동안 울릉군 발전의 또 다른 전기가 될 ‘일주도로완전개통’, ‘사동신항 준공’, ‘울릉공항 건설 확정’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울릉군민의 가슴 속에 담겨있는 ‘불굴의 개척정신’을 바탕으로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위기 때마다 하나 되어 이겨내 온 울릉군민의 저력이 있었기에 가능 했던 일입니다. 오직 군민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꾼을 믿고 변함없는 관심과 응원을 아끼지 않으신 군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김 군수는 또 “지난 태풍 하이선으로 독도 접안시설과 사동항 방파제, 일주도로 등이 큰 피해를 입었다”면서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태풍피해를 복구하는데 군민과 함께 온 힘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코로나 3차 대유행이 시작된 지금 코로나19 전국 확산으로 국가적 위기 상황에 직면했지만 울릉도는 확진자 제로인 청정지역이다. 코로나 철벽방어에 성공한 김 군수에게 코로나가 종식되거나 백신이 완성되면 울릉도와 독도의 관광자원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올 한 해는 코로나19로 인해서 울릉도 관광산업뿐만 아니라 경제전반이 위기에 처해있어, 군민 모두가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울릉군민 중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단 한명도 발생하지 않았고, 울릉도 대표 특산물인 오징어가 지난해보다 많이 잡히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울릉도 관광패턴에 많은 변화가 예상되는 시기입니다. 중·장년층, 단체 관광객이 주를 이루던 것이 올해부터는 개별 관광으로 전환되면서, 학생, 신혼부부 등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여 울릉도가 가진 특별한 매력을 즐기고 있습니다. 앞으로 코로나 백신이 완성되면 울릉도를 찾는 관광객이 대폭 증가 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울릉도를 산과 바다 태고의 신비를 오감으로 즐길 수 있는 관광지로 개발하고 특히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 숨 쉬는 ‘친환경 생태관광섬’으로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난개발을 억제하고 단순히 보고 즐기는 관광에서 벗어나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힐링할 수 있는 ‘친환경 해양생태관광’개발에도 힘쓰겠습니다.” 김병수 울릉군수 (사진=민동근 작가ⓒ트래블아이) ‘친환경 해양생태관광’은 어떤 것인지 김 군수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보았다. “말 그대로 친환경과 생태관광이 합쳐진 말입니다. 대한민국 제1호 국가지질 공원인 울릉도·독도가 지질유산의 학술적 가치가 세계적인 것으로 이미 용역결과 밝혀졌습니다. 저는 군민과 함께 세계적인 자연유산을 보호하고 울릉도에 있는 화물차와 버스 및 승용차를 전기차 등 친환경차로 대체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항이 완성되면 더 이상의 난개발을 막고 그리스 산토리니처럼 친환경 섬을 만들겠습니다.” 김 군수는 이어 “어촌 뉴딜사업300에 울릉도의 4개 어촌마을이 선정되었습니다. 천부항, 학포항, 웅포항, 태하항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섬마다 약 100억 규모로 총 400억 이상의 예산이 투입됩니다. 그 중 서면 태하 항 일대는 기존의 개척사 테마관광지, 태하등대 모노레일, 경관전망대 등과 함께 ‘역사 생태 놀이터’를 비전으로 89억 5천만 원을 투입, 해양심층수 체험센터, 어항시설 정비, 황토구미 로드조성 등을 추진할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김 군수는 천혜의 자연자원과 아름다운 비경을 자랑하는 울릉도에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준비가 하나씩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상세하게 밝혀주었다. 김병수 울릉군수 (사진=민동근 작가ⓒ트래블아이) 이번에는 국내외 관광객 유치에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질문을 던졌다. “우리군의 장점이며, 단점이 내륙과의 접근성입니다. 어려운 접근성으로 인해 희귀 식생물을 자랑하는 한국의 갈라파고스 보물섬인 울릉을 지금까지 잘 보존해오고 있습니다. 울릉도에 오기 위해서는 여객선을 타고 와야 하고, 여객선의 연간 결항일이 100일 이상되기 때문에 울릉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에게는 다소 불편하고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무엇보다 국내외 관광객이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2천톤급 여객선이 취항되어 포항과 울릉도를 왕복해야 합니다. 지금의 소형여객선은 파도가 3m이상이면 출항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날씨의 영향을 심하게 받습니다. 하지만 2천톤급은 4m파도에도 운항이 가능해져서 군민들의 생활에 활력소가 되고 여행자들도 더 안전하게 왕복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지난 11월 착공식을 시작으로 2025년이면 완공될 울릉공항이 이러한 불편을 해소해줄 것입니다. 공항이 완공되면 울릉도가 제주도에 이어 신혼여행지로 각광 받게 될 것이고 저는 울릉공항이 조기에 완공될 수 있도록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울릉공항 착공식 행사 (사진=울릉군청) 김 군수는 40년전 울릉군에서 공무원생활을 시작했다. 김 군수에게 그 때의 울릉도와 지금의 울릉도 중 잊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다. “지금도 잊지 않는게 하나 있어요. 군민과 함께 일을 하고 식사를 할 때 주위에서 가족처럼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그런 정이 앞으로도 계속 울릉도를 찾는 손님들에게도 전해졌으면 합니다.” 김병수 울릉군수는 취임후 추진한 닥터헬기사업 대신 20억의 예산을 들여 울릉소방서의 신축부지공사를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소방헬기를 상주시키기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 이는 지난해 독도해상구조 헬기추락을 재연하지 않기 위해서다. "울릉군에서는 울릉소방서 유치를 위해 사력을 다했습니다. 울릉소방서의 소방헬기가 상주한다면 닥터헬기 이상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친환경 에너지사업의 경우 울릉군민의 친환경에너지 복지 향상을 위해 ‘LPG배관망 구축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또한 친환경 전기차 보급 사업 또한 계속되어 현재 381대의 전기자동차가 울릉군에서 운행 중이며, 2021년도에는 좀 더 많은 전기차로 대체할 계획입니다." 김 병수 울릉군수는 끝으로 울릉도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끝까지 보호하면 좋겠다면서 머무는 동안 울릉도의 멋과 맛과 아름다움을 꼭 느껴보기를 당부했다. 울릉도 삼선암 (사진=최치선 기자 ⓒ트래블아이) 도동항 풍경 (사진=최치선 기자 ⓒ트래블아이) “동해의 작은 대한민국 ‘울릉도’와 민족자존의 섬 ‘독도’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섬입니다. 이른 봄이면 화산섬의 비옥한 산야에서 ‘명이나물’, ‘부지갱이나물’ 등 온갖 산나물이 풍성하고, 여름이면 맑고 푸른 바다에서 해양레저 스포츠를 만끽한 수 있고, 가을이면 성인봉 원시림 숲 속을 거닐며 힐링하고, 겨울이면 포근한 눈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꿈꾸는 울릉도는 그야말로 하늘이 숨겨놓은 ‘보물섬’입니다. 스페인에는 ‘순례자의 길’, 제주도는‘올레길’이 있듯이 울릉도에는 ‘해담길’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울릉도 개척민들의 고단한 삶의 애환을 담고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길, 푸른 동해바다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아름다운 길 울릉도의 매력적인 진면모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해담길’을 꼭 한번 걸어 보시길 추천합니다.” (김병수 울릉군수와의 인터뷰는 기다리고 있는 민원때문에 오래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전 서면질의서를 보냈기때문에 충분한 답을 추가로 들을 수 있었다. 위 사진 중 노마스크는 사진촬영을 위해 인터뷰가 끝나고 마스크를 벗어달라고 부탁한데 따른 것이다. 촬영 때에도 김 군수 외에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했음을 밝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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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캐런 이분란 소장...프로의식과 아이디어가 샘솟는 여행 기획자
[인터뷰] 캐런 이분란 소장...프로의식과 아이디어가 샘솟는 여행 기획자
[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영국의 중요한 낭만주의 시인이자 계관시인이었던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1770년 4월 7일 - 1850년 4월 23일)는 여행을 무척 좋아했다.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도 언급될만큼 워즈워스의 여행벽은 유명했다. 그는 스무살이 되던 해 가을 알프스 도보 여행에 나선다. 워즈워스는 제네바에서 샤모니 골짜기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생플롱 고갯길을 넘어 공도 협곡으로 내려가서 마기오르 호수에 이르렀다. 그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본 것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수많은 풍경들이 내 마음 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지금 이 순간, 내 평생 단 하루도 이 이미지들로부터 행복을 얻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큰 기쁨이 밀려 온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수십 년 뒤에도 알프스는 계속 워즈워스 안에서 살아남아, 기억 속에서 그곳을 불러낼 때 마다 그의 영혼은 힘을 얻었다. 이렇게 알프스가 그의 기억 속에 계속 살아남게 되자 그는 자연 속의 어떤 장면들은 우리와 함께 평생 지속되며, 그 장면이 우리의 의식을 찾아올 때마다 현재의 어려움과 반대되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 속의 이러한 경험을 "시간의 점(spot)"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때는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세운다. 워즈워스는 자연 속에 이런 작지만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는 믿음 때문에 자신의 많은 시들에 매우 구체적인 부제를 붙이기도 했다. 예컨대 <틴턴 사원>의 부제 - "1798년 7월 13일 여행 중에 와이 강변을 다시 찾고" - 는 정확한 날짜를 명기하고 있다. 이것은 산골에서 골짜기를 굽어보며 보낸 몇 순간을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고 유익한 순간으로 꼽을 수 있으며, 따라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만큼 정확하게 기억할 가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늘 새로운 여행을 꿈꾸는 주인공 여행은 이렇게 시인의 시에 생명을 불어 넣는 역할을 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시간의 점으로 남아 위로와 희망을 주기도 한다. 오늘 소개하는 주인공 역시 뜨거운 청춘을 여행과 함께 시작해서 지금은 글로벌 여행 전문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만큼 여행과 주인공은 바늘과 실처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늘 새로운 여행을 꿈꾼다는 주인공의 이름은 캐런 이분란 소장이다. 이 소장은 자신의 성공을 함께 해 준 캐런이란 닉네임을 사랑한다. 인터뷰는 캐런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이대역 앞에 있는 캐런의 회사는 여행카페를 겸하고 있다. 여행자들이 편하게 들려서 차도 마시고 친목 도모도 할 수 있는 장소로 꾸며놨는데 실제 가보니 유럽의 작은 카페 느낌이 물씬 났다. 캐런은 딱딱한 사무실 보다 편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카페같은 공간이 좋아서 직접 인테리어를 했다고 한다. 인터뷰 시작 전 카페 안을 천천히 살펴 봤다. 벽에는 독일의 명소 사진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오랫동안 바이에른 관광청과 독일철도 한국사무소 총판을 해 온 흔적 같았다. 그밖에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직접 고른 기념품과 액자, 여행 관련 책 등이 장식장에 진열되어 눈길을 끌었다. 여행은 자유이자 힐링 “여기 있는 기념품과 사진 모두 직접 구하신 거에요?” 밀크 티를 탁자에 내려 놓은 캐런에게 던진 첫 질문이었다. “그럼요. 제가 독일 출장가서 찍은 사진과 기념품, 캐나다, 인도, 유럽 여러 나라들, 아프리카와 남미 등에서 가져온 물건들까지.” 그녀의 기념품과 사진은 카페에서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으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나라를 다니셨는데 소장님께 여행이란 무엇입니까” 캐런은 독일철도 한국총판과 바이에른관광청 한국사무소 소장외에도 캐나다와 북미 철도 티켓까지 판매해 전세계 주요 대륙의 열차를 한국 여행자들에게 연결시켰다. “저에게 여행은 자유이자 힐링이죠. 내가 여행을 하면서 살지 않았다면 난 아마도 지금 한국에 살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광고기획사 사람들처럼 획기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시장에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여행 ‘이노베이터’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것보다 2배는 더 열심히 달려 여행업계의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낸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그래서 여행목적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최소한의 인원으로 만족스러운 힐링여행이 되도록 그 역할을 해주는 여행기획자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그저 여행이 좋았다”고 말하는 캐런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여행을 이야기 한다. “꿈 많은 대학시절 관광경영학을 전공 했어요. 졸업 후 죽기 전에 30개국만 여행해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50을 바라보는 지금 제 꿈은 단지 여행 자체가 아닌 여행업계의 ‘이노베이터’로 한국 여행업계의 한 획을 긋는 것입니다. 지금도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 중입니다. 그래서 내년부터 여행상품 개발자로서 긴장을 늦추지 않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그동안의 여행기록들을 모아 여행에세이를 출간하려고 합니다. (그녀는 2016년부터 브런치를 통해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현재 1460명의 구독자가 있다) 하지만 책 출간의 의도는 여행작가 보다 여행경험을 바탕으로 여행상품 개발자가 되고 싶은 거죠.” 캐런은 계속해서 여행개발자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그만큼 오랫동안 생각하고 준비한 일이다는 느낌이 들었다. “외국에는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직접 현지답사를 하고 여행상품을 개발하여 공급하는 상품개발자(product manager 또는 tour coordinator) 라는 직업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누구도 버킷리스트가 될 여행을 단체로 갈거 같지는 않거든요. 그렇다고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혼자 가는것도 쉽지않겠죠. 그래서 누군가에게 버킷리스트가 될수 있는 여행상품을 테마별, 계절별로 내가 발로 뛰면서 현장 답사를 통해 예산에 맞게 개발한다면 여행목적이 맞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원으로 만족스러운 힐링여행을 할 수있지 않을까요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바로 여행기획자이죠. 그래서 그동안 진행 해 온 많은 업무를 정리하고 있는 중 입니다.” 첫 번째 기획...유럽 겨울여행 ‘아이슬란드 오로라 상품’ 캐런은 그동안 갖고 있던 소장이란 직함을 정리하고 상품개발자(투어플래너 혹은 Tour coordinator)로서 출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첫 번째 작품이 무엇이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 금방 답을 내놓았다. “첫번째 테마는 유럽겨울여행으로 2020년 1월 초에 출발하는 아이슬란드 오로라 상품입니다. 이번 테마여행의 고객 타깃층은 시간이 없어서 여행조차 가기 쉽지않는 4050을 위한 로드트립이고 이 달 정기여행설명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녀는 내년도 계획에 대해서도 소규모 테마기획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의 겨울여행을 시작으로 내년부터 이런 소규모 테마기획 여행을 몇가지 구상하고 있는데 소규모 기획여행에 관심있는 여행사에는 언제든지 여행상품을 공급할 의향이 있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여행업계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월급을 주지 않아도 되는 세계여행 상품기획자를 알고 있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연락해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노선을 바꾸고 새로운 방향에서 일을 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독일철도청 한국총판으로 바이에른 주 관광청 소장으로 그동안 여행업계에서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잘 지내온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돌아보니 여행업에 몸담은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다녀온 팸투어와 트래블마트 참가 경험을 바탕으로 여행에세이도 출간하고 내가 누린 혜택을 여행업계 또는 잠재력 있는 여행자들과 그 고마움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출간을 앞두고 있는 여행에세이는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다. “이번책은 해외여행 위주로 내용이 채워지지만 만약 지자체의 협조로 국내도 다양한 팸투어 기회가 주어진다면 국내테마여행기획에도 관심이 많아요. 대한민국도 해외 못지않게 좋은 데가 많으므로 이제는 국내에서 더 바쁘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 책은 해외에 이어 국내여행을 위주로 다루고 싶습니다.”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완벽한 원시의 나라 전세계 수많은 관광지 중 여행상품개발자로서 터닝 포인트가 될 첫번째 상품을 아이슬란드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슬란드는 제가 그동안 다녔던 수많은 나라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습니다. 오로라와 빙하와 멋진 폭포 거기다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지닌 활화산까지 완벽한 원시의 모습을 갖춘 곳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아이슬란드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4050 세대들이 자신의 일에 치여서 시간과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들에게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부하는 아이슬란드 오로라 여행을 선물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이슬란드 상품은 어떻게 구성되었나요? “패키지와 다르게 현지에서 자동차로 6박8일간의 일정을 함께 합니다. 따라서 여행자들은 각자 항공권을 구입해 아이슬란드로 와야 합니다. 저는 그분들을 공항에서 픽업한 후 레이캬비크에서 요쿨살론까지 이동하며 골든서클 등 주요 관광지와 오로라, 빙하를 체험하게 됩니다. 여행자는 차량 렌트비과 식대, 숙박 비용을 인원 수에 맞춰 나누면 되기 때문에 혼자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저렴한 비용이 듭니다.” 캐런은 지금까지 해 온 독일 바이에른 관광청과 도이치반 한국총판 소장의 경험이 앞으로 여행상품개발자로서 일하는데 크게 일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은 20년 이상 여행업계에서 해 온 결과물들로 증명된다. 1996년 한국관광공사에서 시행하는 관광영어통역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1998년 자유투어에 입사한 그녀는 해외 인솔 업무를 수행했다. 1년 후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회사를 나와 독립을 선언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2005년까지 55개국을 여행한 그녀는 2005년 독일철도청 한국총판 유레이드코리아 설립(B2B)한다. 이 때부터 그녀의 전성기는 시작된다. 승승장구 하던 그녀는 2007년 세계철도여행센터 법인을 설립(B2C)하고 아시아의 패권을 거머쥔다. 그 후 2010년 미국 캐나다 자유여행 전문 와투트래블을 만들고 북미 시장까지 뛰어 든다. 여행사를 하면서 2011년 독일 바이에른 주 관광청 한국사무소까지 오픈하는 기염을 토한다. 2014년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 <와투여행갤러리>라는 여행카페를 오픈하고 지난해에는 회사를 여행상품개발 및 여행기획컨설팅 전문 <와투여행기획>으로 상호변경한다. 이렇게 숨가쁘게 달려온 그녀는 올해 들어서 여행콘텐츠전문 아카데미 <힐링홀리데이 휴 센터> 힐링강좌를 개설해 여행과 힐링을 접목시켰다. 프로의식과 아이디어가 샘솟는 여행 기획자 캐런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느낀 점은 철저한 프로의식이 배어 있는 여행인이고 아이디어가 샘솟는 여행 기획자라는 사실이었다. 캐런은 인터뷰를 마치면서 “여행이 좋아서 여행업에 뛰어 들었고 지금까지 열심히 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여행인으로서의 삶을 살 것”이라며 “여행상품 개발자로서 세계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데 관심을 갖고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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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도 이화국제학교...“4개 국어와 악기, 운동을 모두 배울 수 있는 학교로 오세요”
중국 청도 이화국제학교...“4개 국어와 악기, 운동을 모두 배울 수 있는 학교로 오세요”
[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모든 학생들이 운동과 악기 하나를 배우고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4개 국어를 할 수 있다. 운동과 악기 하나씩을 배우고 또한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돌아가며 수업을 받는다. 거기다 제주도에서 방학을 보내며 현장학습도 한다. 이런 학교가 정말 있을까? 바로 중국의 청도 이화국제학교(교장: 양승옥)이다. 이화국제학교는 한국 학생을 대상으로 신입생(편입생 포함)을 모집하고 있다. 2004년 설립된 청도 이화국제학교는 현재까지 약 4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양승옥 교장선생님을 만나서 청도 이화국제학교에 대해서 자세히 들어 보았다. 다음은 양승옥 교장과의 일문일답. 청도 이화국제학교는 어떤 목적으로 설립되었나요? 본교는 중국 중앙정부로부터 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로 인가를 받아 15년 째 운영 중 입니다. 청도 이화한국학교 국제부를 모태로 현재 일본에도 분교가 세워졌습니다. 4개 국어를 자유자래로 구사하며, 일본과 중국, 필리핀 등으로 이동하면서 학습의 효과를 최대한 향상 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청도 이화국제학교는 국제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목적으로 설립 했습니다. 학교의 시스템과 특징은 무엇입니까? 한중일 국제학교 공동운영 시스템으로서 희망자에 한해 1년 동안 일본 쿠슈에 있는 미야자키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습니다. 또한 방학기간은 한국의 제주도에서 3개월간 머물 수 있고 교과학습과 현장 체험학습도 하게 됩니다. 한중일 교육의 특징은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 원어민 학습을 할 수 있고, 1인 1악기 학습을 합니다. 또한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해서 특강을 하고 중국과 일본의 문화탐방 여행을 실시합니다. 그밖에도 인성학습으로 양로원과 고아원 등을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합니다. 한중일 3개국을 이동하면서 학습을 하게 되면 학비가 꽤 들 것 같은데요. 얼마나 합니까? 1년 기준으로 중국은 등록금 600만원과 숙식비 600만원, 과외비 100만원(영어+중국어) 모두 포함해서 1300만원입니다. 2년차부터는 중국과 일본을 선택해서 학습 받을 수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는 비용이 똑같지만 일본은 1600만원입니다. 그리고 방학 때는 중국 캠프를 운용하는데 희망자에 한해서 200만원입니다. 등록금 150만원과 숙식비 50만원 포함입니다. 장학금 혜택은 어떻게 되는지요? 청도 이화국제학교는 한중일 국제학교 시스템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장학금 혜택도 다양합니다. 목회자 자녀 장학금, 농어촌 자녀 장학금과 성적 우수자 장학금, 모범생 선발 장학금과 학교장 추천 장학금은 등록금의 20%를 지원합니다. 청도 이화국제학교가 자매 결연을 맺은 외국 학교는 있습니까? 네, 일본 미야자키 중고등학교, 필리핀의 바타안크리스찬스 중고등학교, 미국의 캘리포니아 유나이티드 유니버스티 등입니다. 청도 이화국제학교에서 배우게 될 교과목은 어떻게 되나요? 중국의 정규 교과 과목과 그 외 영어, 일어, 중국어를 따로 배우게 됩니다. 커리큘럼의 특징은 교육목표로 재미있는 학교 만들기, 학습목표는 재미있는 수업 진행, 인성지도로 품격 있는 리더 교육 입니다. 즉, 학생의 눈높이 맞추기 수업과 취미, 특기, 장점 살리기, 적성에 맞는 진학지도, 스트레스 없는 학습지도, 자기주도 학습 멘토링, 교과 교실제 도입, 레벨 별 수업 지도, 모든 학생에게 악기 및 운동지도, 매년 적성 검사 실시 및 진로 코칭, 매주 한 시간 하고 싶은 것 하기, 본인이 목표 설정하고 진행하게 하기, 외국어 회화를 통한 지성 교육, 공동체 훈련을 통한 인성교육, 악기 연주회를 통한 감성 교육, 체육 활동을 통한 협동심 교육, 리버럴 아트를 통한 리더 교육 등입니다. 모집정원과 기간은 어떻게 됩니까? 모집기간은 상시모집입니다. 저희 학교는 9월에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8월까지 접수하면 좋습니다. 모집인원은 학급당 10명 정원 기준으로 각 학년 별 결원 수 이내로 선발합니다. 현재 각 학년 10명씩 모두 60명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지원자격은 어떻게 되나요? 현재 한국 중고등학교에 입학(편입) 예정이거나 학년 이전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학생, 청도에 부모와 함께 거주 또는 거주 예정인 학생, 유학생으로 입학예정인 학생(보호자와 동거 학생)입니다. 중학교 졸업 후 유학을 준비 중인 경우 또는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도 가능합니다. 졸업생들은 주로 어디에 진학합니까? 현재까지 15회 졸업생들 중에 한국의 명문대(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와 중국 명문대(북경대, 청화대, 복단대, 인민대, 상해교통대, 북경사범대, 대외경무대 등) 일본의 동경대를 비롯해 미국 유수의 대학에도 진학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영어권 서방국가로 진학이 쉽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취업률 또한 150% 이상입니다. 저희 이화국제학교 국제부에서는 학생 각자의 맞춤식 플렌으로 매년 명문대를 진학하고 있습니다. 청도 이화국제학교 입학에 대한 자세한 상담과 문의는 010-2349-6981, 010-2975-4624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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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정기 캘리그라퍼...“글씨에 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을 담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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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매취순의 한문 純자를 붓글씨로 써서 매실주 역사상 대박을 친 주인공을 만났다. 주인공은 김정기 캘리그라퍼, 그는 지난 1991년 보해 디자인 부서에서 근무 하고 있었다. 당시 매취순은 88올림픽 공식 만찬주로 선정된 이후 매출에 큰 기여를 하는 효자 상품이 됐다. 보해 디자인 부서는 제2도약을 준비하는 매취순의 새로운 로고체를 개발하기 위해 매일 밤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특히, 김 작가는 대한민국의 유명한 서예가들로부터 받은 순할 순자가 모두 사장의 눈에 들지 않아서 고민이 깊어갔다.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사장으로부터 퇴짜를 맞아 김 작가 본인이 쓴 ‘순’자만해도 수 천 번이 넘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밤을 새우다시피하며 純자를 쓰던 어느 날 잠이 확 깨는 로고가 탄생했다. “그날도 점심 때 반주를 하고 돌아와 술이 절반쯤 취하 상태로 純자를 썼어요. 그런데 다른 때와 다른 느낌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봤죠. 옆에 있던 동료도 보고는 너무 좋다고 하는 겁니다. 그 때 감이 왔어요. 이거다.” 김정기 작가는 그날 사장님께 엄청난 칭찬을 듣는다. 그가 쓴 純자로 출고된 매취순은 전무후무한 대박행진을 기록한다. 그렇게 김정기 작가는 젊은 날 매취 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회사를 나왔다. “제 성격이 좀 까칠해요. 그래서 조직 생활이 잘 맞지 않지만 오래 살아 남은거죠.(웃음), 그러다 IMF도 터지고 저는 제가 갈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캘리는 사실 누구한테 배운게 아니고 제가 스스로 오래전부터 해 오던 것이었습니다. 純자 역시 캘리라고 할 수 있죠. 당시에는 캘리라는 단어가 없었으니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캘리와 같아요.” 그는 스스로 서체를 고안하고 개발하고 주위에도 많이 소개했다. 화선지와 붓이 아닌 펜과 일반 종이에도 특별한 재료가 없어도 그는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오랫동안 연습한 결과겠죠. 글씨를 통해 세상이 아름다워질수 있고 사람들의 마음이 즐겁고 행복해 질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더 열심히 썼던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이 써준 글씨 하나가 선물이 되었고 어떤 이에게는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받았다. 지금은 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캘리 작품을 선물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한다. “캘리의 세계 역시 끝이 없는 것 같아요 하면 할수록 더 깊어지고 넓어지기 때문에 끝임없이 노력해야 됩니다. 물론 어느 정도 배우면 자신의 서체를 개발할 수는 있지만 거기가 끝이 아니고 시작인거죠. 저 역시 많은 작업을 통해 저만의 서체를 개발하고 지금은 그것으로 밥을 먹고 있지만 가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재 전국의 캘리 인구는 시간에 비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전국에 수많은 사설 인증기관이 세워졌고, 캘리를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진정한 캘리작가가 많지 않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캘리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이 나쁜게 아니라 실력도 안되는 사람들이 학원을 차리고 엉터리 교습을 통해 자격증을 남발하고 있어요. 그렇게 캘리의 물을 흐리는 사람들 때문에 정작 진짜 작가들까지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캘리는 작품이고 캘리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해요. 그것이 진정한 캘리의 세계입니다. 단순히 돈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캘리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일 뿐입니다.” 김정기 작가는 그동안 수많은 퍼포먼스를 통해 캘리의 세계를 일반인들에게 전파했다. 특히, 광화문에서 대형화선지에 자신의 키만큼 커다란 붓으로 캘리를 써내려갈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제가 그동안 수많은 강의와 퍼포먼스를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남경찰청 앞에서 대형글씨 캘리퍼포먼스를 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동생이 '80년 5.18 당시에 발포명령을 거부 한 전남도경국장 안병하 치안감의 아들인데 그 친구의 부탁을 받고 흉상제막식에 참석해서 캘리퍼포먼스를 한 것이죠. 정말 숙연한 분위기에서 저 역시 광주의 아들이기 때문에 혼신을 다해 써내려간 작품이었습니다. 그 때의 분위기와 역사적 소명의식 그리고 뜻깊은 일에 동참했다는 보람 등이 섞여서 지금까지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 작가는 현재 디자인 전문회사 (주)디자인커넥트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그는 20년 가까이 전국의 대학과 거리 그리고 수많은 매체에서 자신의 솜씨를 보여줬고 가르쳐 왔다. 그가 앞으로 캘리를 통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것보다 캘리작가님들이 캘리를 단순히 취미나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다른 여타 예술작품과 마찬가지로 진정성 있는 작업을 통해 한차원 발전 시켰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거든요. 돈을 쫓지 말고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키기를 바랍니다. 실력을 갖추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면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쓴 글씨 하나가 수십에서 수백 만원에 팔리고 유명해지니까 경제적으로 충분히 독립하게 됩니다. 저는 앞으로 캘리를 세계인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특히, 한글을 캘리로 만들어서 보급하고 세계 속의 한글이 우뚝 설 수 있도록 기여하고 싶습니다. 또한 캘리 동호인들이 진정으로 캘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본인이 현실과 타협하고 안주하면 저는 그런 분까지 끌어 올릴 수는 없어요.” 김정기 작가는 분명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캘리의 세계를 소개하고 안내하고 가르치는 것까지 할 수는 있지만 결국 캘리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이기 때문에 최종 결정은 본인이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캘리는 정말 배우기 쉽습니다. 누구나 적은 돈으로 자신의 서체를 개발하고 자신만의 캘리세계를 완성 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노력하시면 됩니다. 가까운 캘리 교습소에서 기초를 배우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고 연구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자신만의 서체 개발이 우선이고 그렇게 될 때까지 노력의 끈을 놓치면 안됩니다. 저 역시 그런 분께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제 이메일이나 연락을 해 주시면 캘리 가이드를 해 드리겠습니다.” 김정기 작가 프로필 2013 – 현재 디자인 전문회사 (주)디자인커넥트 대표이사 2015 - 현재 네이버 캘리그라피 밴드 리더 / "캘리그라피마당" 회원 4,300명 2018 - 국민성공시대 신창조인대상 수상 2012 - 현재 (사)한국녹색디자인협회 이사 2015 - 현재 (사)한국농식품6차산업협회 브랜드개발위원장 1985 - 2002 보해양조주식회사 디자인, 광고팀장 역임 강의 및 캘리그라피 퍼포먼스 경력 2019. 코트야드 메리어트 호텔 서울 판교 Wedding Showcase 행사 포스터 디자인 2018. 충북 영동군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방안 연구용역 진행 2018. 중소벤처기업부 주최 창업지원 제품개선 아카데미 코칭 진행 2018 서울문화홍보원(SCPR) CI, 부여군 황룡면/논산시 연산면 등 지역개발 관련 계획 수립 외 다수 2017-현재 경남 김해, 고성 스토리텔링 수립 진행 중 2017 서대문구 에너지센터, 연희동자치마을 에너지센터 홍보 전시관 및 홍보물 디자인 진행 2017 프랜차이즈"야왕곱창" BI, 기타 중소업체 CI 및 BI 등 2017 화장품 Ladykelly 로고타입 디자인 진행 및 수딩솔루션 기초화장품 BI 진행 2017.5 강원대학교 창업선도대학 창업자 자가진단 멘토링 수행(디자인 부문) 2017.2 경기도 하남시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커뮤니티 매핑 인포그라픽 진행 2015-2017 경남 합천군 스토리텔링 수립 진행 2015-2017 경남 창녕군 스토리텔링 수립 진행 2016 전남 광양 로컬 브랜드 디자인 진행(부저농원) 2016 강남구 일원동 축제 “벼룩난전” 캘리그라피 이미지 개발 2016 강남구 일원동 관광 스토리텔링 커뮤니티 매핑 인포그라픽 진행 2015-2016 경북 청송군 진보전통시장 선(先) 사과데이 축제 연구 2015 경북 달성군 옛마을농장 스토리텔링 수립 2015 KBS미디어 『우리 땅 독도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제작 프로젝트 2015 경북 청송군 진보면 행복마을권 스토리텔링 수립 및 CI 개발 2015 KOREA DESIGN SCHOOL 로고 제작(CI) 2014 서울시 “내손 안의 서울” 지도 및 캘리그라피 1997-2015 (주)움트리 BI 개발 및 디자인, 인터넷마케팅, 광고 전반 컨설팅 2013 전남 곡성군 기차마을-가정마을 스토리텔링 수립 2012-2014 경남 산청군 로컬브랜드 개발 컨설팅 2013 경남 산청군 “동의보감촌” 공동브랜드 개발 2013 순이 콘서트 “삼삼오오 뮤지컬” 타이틀 캘리그라피 2012 성남 SESS(성남사회적기업육성네트워크) CI 2011 “인순이와 좋은 사람들” 로고타입 캘리그라피 2004 함평군 복분자 와인 “Red Mountain" BI 2005 구례군 “산수유와인” 복분자 와인 등 BI 2002 보해양조 “잎새주” BI, AD 1996 보해양조 프리미엄 소주 “김삿갓” BI 1991 보해양조 매실주 “매취순” BI 기타 해태F&B, 삼화식품, 우리밀 등 중소기업 CI, BI, 광고물 제작 컨설팅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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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연경 이사...“플랜더스와 브뤼셀 공항 알수록 즐거워요”
[인터뷰] 김연경 이사...“플랜더스와 브뤼셀 공항 알수록 즐거워요”
[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20대 후반의 나이에 여행업에 뛰어든 김연경 이사는 현재 벨기에 플랜더스 관광청과 브뤼셀 공항 한국대표사무소를 책임지고 있다. 김 이사는 이미 10년 전부터 서호주 관광청을 운영하며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서호주 퍼스 지역을 한국에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프린세스 크루즈로 사업을 확장시켰다. 그리고 지금은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과 북쪽지역에 속하는 플랜더스 관광청의 한국사무소를 맡고 있다. 김 이사가 손대는 사업마다 남다른 성과를 내면서 업계에서는 칭찬이 자자하다. 플랜더스를 여행하려는 한국인들에게 하나라도 더 홍보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김 이사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이미지에 비해 파워풀한 행동이 인상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UN본부와 NATO본부가 있는 작지만 강한 나라 벨기에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광화문 찻집에서 김 이사를 만났다. “지난번 라트비아 대사관에서도 인사드렸는데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네요. 더 건강해진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김 이사는 약속 시간보다 5분 정도 늦게 나타났다.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먼저 일어나 인사를 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제가 주말에 운동을 하다 손을 다쳐서 병원에 급히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그녀의 말에 놀란 눈으로 손을 보았더니 정말 한쪽 손에 아직 퍼렇게 멍자국이 나 있었고 제법 부어 보였다. “전화를 주시지 그러셨어요. 병원에서 충분히 치료 받고 인터뷰는 나중에 해도 되는데...” 김 이사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아니에요. 거의 다 나았어요. 처음엔 정말 많이 부어서 손을 움직일 수 없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멀쩡합니다.” 다행이었다. 김 이사의 호탕한 웃음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벨기에에 대해 궁금한 게 참 많았기에 앉자마자 질문부터 시작했다. 우선 벨기에와 플랜더스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벨기에는 우리나라 경상도 크기만한 면적에 인구는 약 1000만이 조금 넘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크기에 비해 속이 꽉찬 나라에요. 나토와 유럽연합 EU본부가 있고 유럽의 모든 나라로 가는 관문이기도 합니다. 허브라고 할 수 있죠. 특히, 제가 맡고 있는 플랜더스 는 아름다운 광장, 웅장한 중세 건축, 자갈이 깔린 거리와 박물관이 있는 도시와 마을들이 서로 가깝게 모여있는 벨기에의 북부지역입니다. 수도 브뤼셀은 벨기에 여행을 시작하기에 아주 편리한 곳 입니다. 브뤼셀에서 여장을 풀고 안트워프, 브뤼헤, 겐트, 루벤 또는 메헬렌으로 이동하며 특별한 시간을 즐겨보세요.” 플랜더스 여행 중 추천코스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플랜더스 여행의 시작점은 브뤼셀입니다. 벨기에의 수도이면서 동시에 벨기에의 다양한 문화를 한 번에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여행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중세시대에서 딱 멈춘 듯한 브뤼헤를 여행한다면 플랜더스를 보다 생생하게 체험하실 수 있어요.” 플랜더스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저는 한마디로 중세로 가는 시간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뤼셀의 그랑플라스(Grand-Place)는 성당, 시청사, 길드 하우스, 왕궁, 백조의 집 등 이야기로 가득한 중세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입니다. 또한 세심한 안목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플랜더스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환희’는 아마도 플랜더스를 가장 잘 대변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플랜더스는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에 새로운 차원을 더하는 장인 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방금 플랜더스의 장인정신이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플랜더스의 장인 정신은 찬란한 문화, 예술, 건축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플랜더스는 박물관에 전시된 소장품처럼 역사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플랜더스는 당신이 보고 즐기는 모든 것에 살아 숨쉬는 그 모든 것입니다. 플랜더스는 독특한 경험입니다. 즉, 플랜더스 장인 정신은 패션, 디자인, 미식 그리고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자를 위한 세심한 배려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플랜더스는 인생에서 좋은 모든 것을 누리고, 동시에 그런 것을 즐길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플랜더스가 낯선 한국인에게 좀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으세요? “플랜더스는 아직 한국인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읽었던 [플란다스의 개]라는 동화와 만화를 떠올리시면 금방 와 닿을 것입니다. 그밖에 와플, 초콜릿, 맥주 등으로 유명하며,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한 축구 강국이기도 합니다.” 이사님께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플랜더스 명소는 어디인가요? “저는 플랜더스의 모든 곳이 다 좋지만 그 중에서도 브뤼해를 좋아합니다. 브뤼셀의 그랑플라스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면 1시간 거리의 브뤼헤(Brugge)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입니다. 도시라기보다는 마을 같은 브뤼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신비한 중세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드는 곳이죠. 역사를 잘 보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여행지이기도 합니다. 브뤼헤 역시 한가운데 있는 마르크트 광장을 중심으로 고딕, 바로크,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을 나란히 감상할 수 있습니다. 중세 시대부터 만들어진 자갈길을 천천히 걸으며 작고 예쁜 상점과 미로처럼 얽혀 있는 작은 거리와 종탑, 예배당 등을 감상하는 것이 이 도시를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도시 구석까지도 보고 싶다면 운하를 따라 운행하는 작은 보트를 타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벨기에 맥주는 유럽에서 얼마나 유명한가요? “플랜더스에서 중세 시대를 가장 먼저 만끽할 수 있는 것은 오래된 건축물들이 아니라 바로 맥주라고 합니다. 2016년 유네스코의 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오랜 맥주 역사를 가진 벨기에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현재 약 5천 종 이상의 맥주를 생산하고 있는 대표적인 맥주 강국입니다. 브뤼셀에 있는 델리움 카페는 기네스북이 선정한 세계 최다 종류의 맥주를 판매하고 있는 맥주 술집으로 어떤 벨기에 맥주를 상상하던 이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한국 여행자들에게 벨기에의 맥주 중에서 일명 ‘수도원 맥주’라고 불리는 트라피스트 맥주를 꼭 경험해 보라고 추천합니다. 중세 시대 수도원에서 금식 기간에 영양 보충을 위해서 그리고 수도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접대용으로 양조 되었던 트라피스트 맥주는 특히 엄격한 규율이 있던 수도회에서 만들어진 맥주를 의미하는데 특별한 맛과 역사를 자랑합니다. 지금도 수도원 내의 양조장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이 맥주들은 오랫동안 전수된 그곳만의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있지요, 여행자들은 이런 트라피스트 맥주에 얽힌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플랜더스의 중세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시간이 없어서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플랜더스 맥주를 맛보고 싶다면 매일 운영되는 다양한 맥주 투어에 참가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맥주 명소가 있다면 추천해 주세요. “브뤼헤의 전통 맥주입니다. 맥주 순례자들이 반드시 방문한다는 할브만 브루어리는 그중 가장 인기 있는 맥주 명소입니다. 광대와 반달이 그려진 라벨로 유명한 할브만 브루어리에는 양조 과정을 보여주는 투어도 있으며, 신선한 맥주를 쉬지 않고 마실 수 있는 바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맥주를 가장 멋지게 마실 수 있는 장소는 마르크트 중앙 광장 어딘가에 있는 카페 2층입니다. 이 도시의 모든 중세 건축물과 마차들이 지나가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맥주를 마시다 보면 어느새 중세로 가는 시간 여행자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맥주 다음으로 플랜더스를 대표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스머프’ 만화 영화와 우리나라에는 덜 알려졌지만 ‘틴틴’이라는 만화 캐릭터도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이들의 탄생지가 바로 벨기에 입니다. 벨기에가 만화로 유명해진 이유는 다양성 때문인 것 같아요. 오랫동안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섞여서 살다 보니 보다 편안하고 가벼운 방식으로 소통하고 어울리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이론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 만화의 중심지 역시 브뤼셀입니다. 브뤼셀 공항 청사 한가운데에는 틴틴 만화에 나오는 대형 로켓이 상징처럼 세워져 있으며, 그랑플라스 바로 옆에는 틴틴 전문 매장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틴틴을 주제로 하는 다양한 전시와 제품들을 만나볼 수 있어요. 이런 만화에 대한 애정은 거리 곳곳에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브뤼셀 건물 외벽에 그려진 만화 캐릭터를 찾아다니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코믹 루트까지 만들어졌고 시내 관광 안내 센터에서도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끝으로 플랜더스에 대해 여행자가 알아두면 좋은 정보 부탁드립니다 “플랜더스 지역에서 도시 간 이동은 기차가 가장 편리하고 운행 횟수도 많고 저렴합니다. 도시가 작아서 각 도시에서는 도보 또는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는 것이 가장 쉽고 편합니다. 그밖에 좀 더 자세하게 여행준비를 하고 싶다면 벨기에 플랜더스 관광청, 브뤼셀 공항, 벨기에 플랜더스 네이버 카페 등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인터뷰를 끝내려는데 김연경 이사는 웃으면서 가장 중요한 걸 빠트렸다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벨기에 하면 초콜릿이 정말 유명해요. 그 중심에 있는 곳이 바로 플랜더스입니다. 초콜릿은 세계가 인정하는 플랜더스의 아이콘입니다. 플랜더스 전역에 걸쳐 약 2130개의 수제 초콜릿 상점이 있습니다. 매년 30만t 이상의 초콜릿을 생산하는 초콜릿 수도로 불리는 플랜더스는 특히 일반 초콜릿보다 프랄린(Praline)이라 불리는 다양한 속을 넣은 초콜릿이 유명합니다. 아름답게 조각된 프랄린은 입에 넣으면 놀라운 질감과 풍미가 퍼집니다. 벨기에 플랜더스 이전에도 스페인, 프랑스에 이미 초콜릿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초콜릿을 대중화하고 명품 대열에 올리고 프랄린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아닌 플랜더스의 초콜릿 장인들입니다. 플랜더스에서 초콜릿의 시작은 예상외로 약국입니다. 한 약국의 약사가 쓰디쓴 약을 삼키기 어려워하는 환자를 위해 약의 겉면을 달달한 초콜릿으로 덮어 환자들 특히 어린이가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후 반응이 좋아지자 약을 빼고 초콜릿만 판매하게 됐다고 해요. 문제는 무더운 여름의 날씨. 초콜릿을 주머니에 넣으면 더위에 다 녹아서 옷에 묻기도 하고, 들고 다니기에도 불편했습니다. 최초의 초콜릿 약을 제조한 약국에서 이것을 보고, 초콜릿별로 담아 보관하는 우리가 요즘 보고 있는 초콜릿 박스를 개발해낸 것이 초콜릿 판매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습니다.” 플랜더스의 초콜릿이 독특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풍부한 코코아 함량 때문입니다. 세계 어느 초콜릿보다 훨씬 더 높은 코코아 함량을 자랑합니다. 여기에 순수 코코아 버터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플랜더스 초콜릿은 최고급 코코아 콩을 사용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유명한 장인들은 자신의 수제 초콜릿 질을 유지하기 위해 남미에 직접 코코아 농장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계 어느 초콜릿보다 품질이 우수하고 맛이 좋습니다.” 이렇게 초콜릿이 플랜더스에서 발전하게 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우선 초콜릿 장인이 가장 많습니다. 세계 초콜릿업계에서 대기업으로 불리는 칼리바우트비콜레이드는 물론 중소업체인 고디바 레오니다스 그리고 창의적인 초콜릿과 전통적인 방법으로 초콜릿을 제조하는 수많은 소규모 수제 초콜릿 장인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초콜릿 장인이 플랜더스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연경 이사의 플랜더스 초콜릿 소개는 봇물 터지듯 계속 이어졌다. “플랜더스의 초콜릿은 대단히 창의적입니다. 전통적인 프랄린 초콜릿 장인들은 물론 디자인과 맛에서 창의적인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생강 퓨레와 고추냉이 같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획기적인 초콜릿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초콜릿을 담은 상자도 초콜릿으로 제조해 박스까지 먹을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초콜릿은 단순한 디저트가 아니라 특별한 경험 그 자체 입니다. 플랜더스에서는 초콜릿 박물관투어 시음워크숍 등 일반인이 참가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즐거움이 있으니 꼭 참석하시면 좋겠습니다. 벨기에 정부는 질 높은 초콜릿에 인증서를 주고 있습니다. 좀 더 품질 좋은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 인증제도를 도입할 정도로 벨기에의 초콜릿 사랑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플랜더스의 모든 주요 도시에는 그 도시를 대표하는 초콜릿 매장이 있으며, 매장마다 장인들이 만들어낸 독특한 프랄린을 맛볼 수 있습니다. 밸런타인데이에 플랜더스로 여행을 한다면 연인과 함께 초콜릿 도보 여행(chocolate walk)을 해보는 것도 좋아요. 플랜더스 각 도시에 있는 다양한 수제 초콜릿 매장은 매장마다 정열적인 초콜릿 장인이 활동하며 각자 자신만의 초콜릿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초콜릿을 만들기도 하고, 초콜릿 비타민, 초콜릿 립스틱 등 흥미로운 아이템도 만날 수 있으며, 새로운 속 재료를 넣은 초콜릿 등이 있어 초콜릿 투어에 참가하면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초콜릿 도보투어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세요. “초콜릿 도보 투어는 현지에서 진행하는 전문 가이드와 함께하는 1일 투어에 합류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대부분 2시간 정도로 이뤄지는 투어는 우선 초콜릿의 기본 지식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이후 초콜릿 매장을 직접 돌아보고 시식하며 설명을 들어보세요.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투어도 가능합니다. 각종 입장료, 모든 초콜릿 시식 등의 비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김연경 이사와의 인터뷰는 알차고 즐거웠다. 벨기에와 플랜더스 지방에 대해 자세히 알았고 플랜더스 도시의 특징과 문화, 맥주, 초콜릿이 유명하다는 사실도 새롭게 들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관광청 홍보를 하면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서호주에 이어 벨기에 특히 플랜더스를 알리게 되어 기쁘고 보람있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또 "앞으로 플랜더스를 좀 더 많은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소개하고 새로운 명소들을 발굴해서 홍보하는데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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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양식 관장 '신들의 땅에 매혹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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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인도박물관 취재 계획을 잡던 중, 박물관의 모든 물건이 개인 소유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인도에 심취했기에 박물관을 만들 정도일까 하는 궁금증은 자연스레 인터뷰로 이어졌다. 조용한 박물관에서 나직하게 ‘안녕하세요’라고 건네는 인사는 팔순의 나이가 무색한 소녀의 목소리였다. 마음속의 고향사람이 있는 곳, 정말 감동적 이었습니다. 내가10살 때, 문학소년 이었던 큰오빠가 타고르시인의 ‘초승달’이라는 책을 추천해 주었어요. 타고르시인이 아이들에게 동화처럼 들려주던 이야기였는데 그걸 읽고난 다음부터 학교 작문시간에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때 담임선생님이 내 시를 보고 반 친구들 앞에서 ‘이게 바로 시입니다’라고 칭찬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학급 뒤 게시판에 한 달 동안 붙여주셨죠. 아마 인도를 만난 것이 그때가 아닌가 싶어요. 지금까지 시를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하구요. 시간이 흘러서 75년, 인도에서 아시아시인대회가 열려서 한국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처음 인도땅을 밟게된 계기였어요. 내가 내내 동경하고 막연하게 그리워했던 인도가 거기에 있었어요. 그때의 경험이 너무 너무 감동적이어서 귀국후에 인도철학과로 대학원 진학을 했죠. 인도의 고대경전을 읽고,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인도의 학문과 만나면서 얻은 것이 너무 많아요. 내가 항상 부족하다고느껴서 찾으려 했던 것, 그게 그곳에 있었어요. 논문을 쓰면서 딱 두 번 울었는데, 한 번은 너무 힘들어서, 그리고 한 번은 너무 기뻐서에요. 내가 인도의 학문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너무 기뻤어요. 그렇게 인도와의 인연을 지속시켜 오면서 인도가 내 인생으로 들어오게 되었죠. 지금은 보시다시피 인도박물관도 열었고, 한인 문화연구도 하고 있어요. 인도 네루대학 한국학과에 장학금도 주고 있지요. 학부, 대학원, 석, 박사 한 사람씩. 그랬더니 요즘 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대요. 예전엔 일본학과가 더 인기였는데…한국학과교수들이 좋아해요. 아마 올해는 “김양식문학상”을 만들 것 같네요. 성인들의 나라 1975년이죠? 비행기 위에서 보니까 황토땅에 거목들이 군데군데 시퍼렇게 서 있었어요. 보고있자니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구. 10일동안 회의를 하고, 회의는 한 사나흘 했나? 열흘을 머물렀는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시인들이랑 같이 슬리퍼를 끌고 돌아다니면서 인도식으로 밥도 먹고. 조병화 선생님은 당신은 그렇게 먹으면 탈나서 안된다고 도망가시더라구. 사나흘 정도 인도 현지인들과 생활을 했는데 그때 아마 내 인생관이 바뀌었을 거에요. 성인들 같은 그 사람들한테 반해 버렸죠. 너무 평화로운 모습이 인상적 이었어요. 지금의인도는 그때와는 조금 달라요. 지방은 아직 그때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큰 도시들은 변화하고 있죠. 몇 년 전에 공항에 갔더니, 그 공항의 호화스러움이 어휴~ 말도 못해요. 인천공항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어요. 공항에 융단을 깔았다고 하면 얼마나 호화스러운지 아시겠지요?인도 전통문양으로 장식한 실내는 입국 심사대에 선 사람들이 모두 압도당할 정도로 호화스러워요. 입국심사 기다리면서 다들 그것만 쳐다보고 있었다니까요. 아마 인도는 지금 발전하는 과도기에 서 있는 것 같아요.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서 걸러내고 또 걸러내겠죠. 인도에는 서양음악과가 없다?인도사람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어요.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서양의 식민지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 대학에는 서양음악과가 없어요. 오케스트라나, 심포니같은 조직된 서양음악 단체도 없지요. 왜냐고 물었더니 당연하대요. 모든 국민이 우리의 고전음악을 사랑하고 아끼고 존경하는데, 왜 서양음악이 필요하냐는 거죠. 철저해요. 아마 민족성인가 봐요. 지금은 아이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배우니까 달라졌겠지만, 75년 당시에는 “Happy birthday” 노래도 몰랐어요. 우리나라의 국악과가 서양음악과 창설 이후에 생긴 것을 보면 참 다르죠. 우리나라가 서구지향적인 문화라면, 인도는 철저하게 자신들의 문화를 고수하려고해요.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프라이드가 대단해요. 길가의 거지들도 경전을 외워 밥을 빌어먹고다니니까요. 이러한 자국의 문화를 대하는 태도가 오랜세월 식민지 생활에도 살아남은 이유가 아닐까요? 반면 교육열은 우리나라와 비슷해요. 어떻게든 공부시켜서 외국으로 보내려고 하지요.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 교육에 대한 열망이 생긴 탓 일거에요. 이런 점은 우리나라와 같죠. 인도여행은 여행하기 전이 중요하다인도를 여행하기 전에 충분한 사전조사를 하는 것이 좋아요. 특히, 갈 곳의 역사를 공부하고 간다면 보다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거에요. 제가 좋아하는 곳은 시르나트(녹양원) 입니다. 오래된 불교 사원인데 석가모니의 첫 설법지로 유명한 곳이에요. 정말 평화로워요. 다 무너지고 탑 하나만 남은 곳이지만 그곳의 공기 자체에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어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곳에만 한 달 정도 있고 싶네요. 아! 인도의 박물관은 꼭 가보세요.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국보급의 물건들이 쌓여 있는 곳이죠. 또, 인도의 물가가 계속 오르고 있으니 사전에 알아 보고가야 합니다. 일년에 30% 이렇게 오르더라구요. 발전 속도가 굉장해요. 흔히들 인도를 잠자는 사자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이제 그 잠자는 사자가 깨어났다고도 이야기하고요. 인도를 가면 뭔지 모를 든든한 안정감을 느껴요. 흔들리지 않는 인도인들의 고집 같은 것. 그런건 아무데서나 느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앞으로 학생들이 인도로 유학을 많이 갔으면 좋겠어요. 물가가 점점 오르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학비도 굉장히 싸고 무엇보다 배울 것이 너무 많아요. 미국이나 호주 등 다른 서양권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죠. 인도는 5천년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깊이있는 문화예술이 있으니까요. 배낭 여행자에게 도움이 되는Tip 파리채/모기향: 인도 사람들은 살생을 하지 않으므로, 파리채나 모기향 등 벌레퇴치용 물건을가져가면 좋다. 바가지: 인도의 곡식에는 돌이나 모래가 많이 섞여 있다고 한다. 밥을 해 먹을 요량이면 바가지 같은 것으로 미리 걸러 주는 것이좋다. 물파스: 인도 현지에서도 구매가능 하나, 이름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려우므로 미리 가져가는 것이 좋다. 교통: 버스와 기차를 많이 이용한다. 요즘은 리무진 버스가 시내버스로 다니기 때문에 아주 편리하다. 기차를 이용할 때는 조금 번거롭더라도 좋은 등급의 기차를 미리 예매하자. 낮은 등급의 경우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 좌석표가 있어도 절대 비켜주지 않는다.음식: 마살라티(Masala tea) 인도의 향신료를 혼합하여 만든차. 한국인들 입맛에는 잘 안맞을수 있으나 인도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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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깔깔씨 안혜연의 I  Love  India
[인터뷰] 깔깔씨 안혜연의 I Love India
“인도에서 만난 소소한 일상들 큰 감동으로 다가와요” 깔깔씨 안혜연은 인도에 잘 어울리는 여자다. 처음 인터뷰 하는 자리에서도 상대의 자유를 허용할만큼. 그녀가 생각하는 인도는 세상을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우주다. 인도에 온 전세계 여행자들을 포용하고 그들이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결과에 대한책임 또한 여행자 자신의 몫이다. 깔깔씨의 입을 통해 듣게된 인도는 또 차이를 인정 하는 나라다. 3번의 인도 여행을 통해 깔깔씨는 자신의 인도를 만든 것 같았다. 퀼트 같은 인도. 각자 다른 성격과 색깔, 모양까지 한데 모여서 자연스럽게 하나되는 모습. 틀이 없는 무형의나라 인도에서는 여행자가 상상한대로 보고 듣고 느끼게 된다. 깔깔씨도 그랬다. 인터뷰 내용을보면 행간에 존재하는 그녀의 여행 속 감동을 느낄수 있다. 인도를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퀼트! 색색의 천조각을 붙여 만든 퀼트처럼, 다채로운 매력을 가진 나라.(깔깔씨의 친절한 Tip : http://travelindia.kr/70105039993)인도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사실 인도로 가기 위해서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아요. 정말 필수적인 것을 꼽으라면여권과 인도비자, 항공권과 돈만 준비된다면 인도로 떠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가 된 겁니다. 여기에 사전조사와 갖가지 준비물, 약간의 모험심과 도전정신, 인도를 향해 활짝열린 마음만 더해진다면 인도 여행준비 끝. ‘즐겁게’ 여행하고, ‘안전하게’ 돌아오면 됩니다.인도에서 꼭 봐야 할 곳과 음식 그리고 해야할 것은?인도에서 꼭 봐야 할 곳과 해야 할 것이라...음...콕 집어 말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여행의 목적과 개인의 취향에 따라 가고 싶은 곳과 특징을 파악해 보고,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오면 된다고 생각해요. 인도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을 꼽으라면,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도사를 꼽겠어요. 도사를 정말 좋아해요. 어떤 도시에 도착하든, 도사가 맛있는 혹은도사를 파는 식당을 찾아내는 것이 첫 번째 일과 였어요. 그만큼 도사에 푹 빠져 지냈어요.(깔깔씨의 친절한Tip : http://travelindia.kr/70116991700 – 도사 만드는 방법 등)인도의 어떤 점이 매력적인가? (=인도를 좋아하는 이유는?)머릿속에 인도를 떠올려 보세요. 막연하게 지저분한 거리, 낯선 사람들의 희번덕이는 눈빛만 떠오르지 않으시나요? 인도는 아름다운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라입니다. 다른 도시에발을 디딜 때마다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도시마다 뚜렷하고 이채로운 매력을 품고 있지요.인도 여행시 주의 할 점은?여행은 불확실성의 연속이에요. 일상속에서 늘 비슷한 패턴으로 지냈던 것에 비한다면,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확률이 많은건 사실입니다. 인도를 여행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된 사람도 있고,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어요. 밤늦게 낯선 곳을 돌아다니면 위험해요. 모르는 사람을 쫄랑쫄랑 따라나서는 것도 당연히 위험한 행동이고요.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을 아무런 의심없이 넙죽 받아 먹는 것 또한, 때에 따라서는 위험 할 수 있어요. 이건 어느나라를 여행하건 공통사항인 것 같아요. 하지 말라는 짓은 절대하지 않는 게 상책 입니다.(학생들이) 인도여행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행길은 인생길의 미니어처 같거든요. 온갖 희로애락이 함께 하지요. 동반자를 잘 만나야 해요.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걸으면 외롭지 않으니까요. 또 길을 잘 찾아야 해요. 어떤 날은 길을 잃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임해야 고달프지 않아요. 때로는 험난하기도 한데,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어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니까. 여행이 끝난 뒤 남겨진 추억은, 삶을 이어가며 사는데 활력이되기도 합니다. 인도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동수단)저는 여행할 때, 걸을 수 있는 곳은 웬만하면 걷는 편이에요. 빠르게 지나가면서 스치던 풍경이, 걸으면 천천히 흐르는 모습으로 다가오거든요. 세세히 들여다 볼 수 있고, 때때로 사람 사는 이이기가 들려 오기도해요. 버스 혹은 기차를 타고 갈 때에 더 많은 풍경을 볼 수 있다면, 걸을 때에는 더 깊은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건강에도 좋고요!인도에서 한국과 완전 다른 문화는?알다시피 인도는 노출에 관대한 편이 아니에요. 우리나라 여자들처럼 핫팬츠 입은 여자를 찾아 보기 어렵지요. 인도에서 다리 노출은 참 야해요. 그런데 반대로, 상체 노출에는 좀 관대한편 입니다. 살집이 두둑하든, 늘씬한 허리를 자랑하든 관계없이 배는 잘도 드러내지요. 그리고술. 인도는 종교적인 이유 등으로 술이 금기시되는 문화에요. 우리나라는 술을 권하는 사회 잖아요? 아주 다르죠. 인도에는 주류반입이 금지된 도시(푸쉬카르 등)도 몇 있습니다. 아! 가장 다른 건, 화장실에 휴지가 없다는 거에요. 대신 수도꼭지만 있지요. 인도에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과 왼손이 하는 일이 따로 있답니다. 오른 손은 주로 밥상머리에서, 왼손은 주로화장실에서 바빠요. 생각해보니 숟가락도 없네요. 손으로 밥을 먹으니까요. 물에 손을 씻고 나서 밥에 달(콩으로 만든 수프)을 부어 조물조물 주물러 입에 쏙 넣거나 짜파티(밀가루로 만든 북인도의 주식)를 한 입 크기로 찢어 찬과 함께 손으로 집어 먹어요. 누구의 입에 들락날락 거렸는지 모를 숟가락보다 내 손이 훨씬 깨끗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죠.인도여행시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물건이나 책 또는 조언은?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물건은 우산을 꼽겠습니다. 햇볕이 몹시 뜨거우면 양산으로 활용해 태양을 피할 수 있고요, 비가 내리면 우산으로 비를 피할 수 있어요. 제게는 그보다 값진 용도로 쓰이는데요. 화장실이 없어서 난감할 때, 더없이 훌륭한 아이템 입니다. 모서리를 찾아내우산을 펼치면 볼일 보는데 낯부끄러운 장면을 연출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책이나 조언은 인도를 여행하기 전, 다른 건 몰라도 힌두교에 대한 대략적인 지식은 알고 가셨으면 해요. 한나라를 바라 보는데, 역사와 문화를 배제하고는 그 나라를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도에서 힌두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생활이지요. 힌두교를 모르고는 그들의 삶을 올바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라마야나>나<마하바라타> 등 힌두교를 엿볼 수 있는 책 한 두 권 정도는 반드시 읽어보고 떠나시길 바랍니다.인도여행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방법이 있다면?사람이요.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요. 여행이끝나고 나면 그 때의 두근거림도, 설렘도 조금씩 사그라지죠. 시간이 지날수록 벅차올랐던 감동도, 때로는 나른했던 일상도 기억속에서 서서히 옅어져가기 마련인데요.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지는 게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에요. 그들은 알고 있을까요? 그들의 소소했던 일상이 내 여행에서는 더 할나위 없는 즐거움이었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동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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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태연 대표, 인도는 사랑의 메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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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물건을 파는 인터넷 사이트를 찾았다. 뒤져보니 직접 인도에서 물건을 떼온단다. 가격도 비싸지 않고… 처음 들었던 생각은 과연 마진이 남을까? 하는 것. 자세히 살펴보니 가족이 같이 하는 것 같다. 굉장히 앳된 얼굴인데 아들도 있다? 이거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분명 인도에 흠뻑 빠져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역시나 집의 입구부터 인도의 향 냄새가 진동을 하고 안에선 쿵짝쿵짝 흥겨운 인도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작은 어머니가 어릴 때 인도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나도 가고 싶다.’ 란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러던 중에 대학교 1학년 여름에 작은어머니께 인도여행을 권유 받았어요. 인도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과 가는 거라 걱정을 하나도 안 했어요. 돈 관리도 작은 어머니가 해 주셨고… 그냥 막연한 생각에 인도는 덥고, 더럽고, 힘들 거니까 그것만 걱정하자 하면서 갔죠. 근데! 생각보다 안 힘든 거에요. 더럽지도 않고, 어~ 괜찮은데? 하면서 식당엘 갔더니 음식도 너무 맛있는 거에요~ 그렇게 인도를 처음 만났죠. 처음 다녀왔을 땐 그냥 첫 해외여행이 인도였구나 하는 정도? 별 감흥이 없었어요.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슬슬 인도병이 생기는 거에요. 자꾸 생각나고, 가고 싶고. 그래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휴학도 하게 되고, 생활의 목적이 인도가 되어 버린 거죠. 두 번째는 친구와 갔어요. 한달 동안. 그리고 모든 배낭여행자들처럼 가능한 한 많은 곳을 다녀오리라는 욕심에 이곳 저곳을 막 돌아다녔어요. 그러고 나서 한국에 왔더니 너무 아쉬운 거에요. 좀 더 느낄 수 있었는데… 그래서 한 달은 안돼! 하고 6개월짜리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거기서 신랑을 만났어요. 인도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6개월 여행 때 바라나시에 타뷸라를 배우는 곳에서 신랑을 만났어요. 처음에는 별로 친하진 않고 그냥 인사만 하는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은 각자 다음 스케줄을 위해 떠나고 결국에는 신랑과 저 그리고 다른 친구 한 명이 남았어요. 그때부터 식사 후에 그들과 차를 마시는 게 일과가 되었죠. 처음에는 바라나시에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이 아니었는데, 타뷸라가 너무 재미있어서 오래 눌러 앉았던 게 신랑을 만난 계기가 된 거에요. 점점 친해지면서 게스트 하우스 옥상에서 인도 커리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그러던 중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어요. 뭐할까 하다가 닭 요리를 해먹자! 하고 의견이 모아져서 소박한 파티를 열게 되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그 친구가 내가 묶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자고 갔어요. 그 전까지는 다른 게스트 하우스에 있었거든요. 그러고는 방을 옮길까 묻더라구요. 저는 룸쉐어를 하자는 건 줄 알았는데 나중에 가서 보니 그게 사귀자는 이야기였던 거에요. 그렇게 사귀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 인도비자가 끊겼어요. 그때 6개월짜리 비자였는데, 중국이랑 네팔쪽에서 2~3개월 쓰고 하다 보니 비자가 끊겼어요. 인도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되어 난 태국으로 가겠다 했죠. 그랬더니 신랑이 자기 스케줄을 다 버리고 따라왔어요. 그리고 태국에서 파라다이스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프로포즈를 받았어요. 시간으로 보면 굉장히 짧은 시간이에요. 2달 반? 3달? 근데 그 하루하루의 농도가 굉장히 진했어요.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났더니 벌써 여기까지 와버린 거 있죠? 아! 제가 신랑이 일본인이란 거 이야기 했나요? Masala India 인도는 마살라에요. 마살라란 향신료를 섞은 것인데, 레시피대로 조합된 향신료 양념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개성 있는 향신료들이 섞여서 또 하나의 개성 있는 마살라가 되는 것처럼, 인도는 문화예술, 종교, 언어 모든 방면에서 마살라에요. 각각의 개성이 너무 달라서 충돌이 있긴 하지만 그 충돌이 있기 전 묘하게 유지되는 밸런스를 가지고 있죠.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마음을 여는 것이에요. 인도는 더럽다. 위험하다. 거지, 사기꾼이 많다. 이런 것들이요. 이런 선입견을 가지니까 순수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도 부정적이 될 수 밖에 없어요. 그게 지속되면 현지인과 여행자 간의 골이 생겨버려요. 물론 정말 속셈을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여행자의 몫이죠. 한가지 팁을 알려드릴게요. 내가 헤매고 있는데 적극적으로 안내를 해주겠다면서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다가오는 사람은 거의 사기꾼이에요. 그들은 약간 영국식 악센트를 사용하는 사람은 교육받은 상류층 사람이죠. 근처의 인도 청년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는 것보다는 겉모습이 나이가 좀 들고, 기름이 반질반질 하면서 배도 좀 나오고, 시계도 좀 좋은 것을 찬 사람을 찾아보세요. 대부분 보통의 상류층 사람이니까요. 정말 좋은 인도 친구를 만나서 마음을 터놓고 교류할 기회를 꼭 잡길 바래요. 왜냐하면 인도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은 인도의 가정집이거든요. 여행을 하기 전 가장 최악을 먼저 상상 해 보세요.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비책도 하나 생각 해 두고요. 저는 예전 여행 때 황달에 걸린 적이 있었어요. 당시 저를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너~ 죽기 싫으면 병원 가는 게 좋을껄?” 하고 놀렸죠. 병원에서 처방 받고 삼 개월간 고기 같은 단백질은 하나도 못 먹고 채소랑 약만 달고 살았어요.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 그땐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저에겐 그게 최악의 일이었네요. 아! 그리고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제발 같이 밥 먹고 같은 곳을 함께 가고… 뭐든 같이 하려고 하지 마세요. 자신의 여행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거에요. 제발! 인도는 갈 때마다 새로운 나를 발견 하는 것 같아요. 끊임없는 선택의 순간과 하루에도 몇번씩 교차하는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거든요. 릭샤 값을 흥정하는 그 순간에도 5루피를 더 깎을지 10분 먼저 출발할지 선택해야 해요. 그런 생각의 생각이 넘쳐가는 곳이 인도에요. 인도에 가면 누구나가 철학자가 되거든요. Tip 1. 주의점 남자 - 여성 여행자들은 어딜 가나 남자 조심. 현지인은 물론, 가끔 고삐 풀린 여행자들도 있다. 김태연씨 역시 고삐 풀린 한국남자들 때문에 꽤나 고생했다고. 물갈이 - 세수나 양치를 할 때 조금 먹는 것으로도 배탈이 날 수 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더욱 조심하자. 미네랄 워터를 사 마시는 습관을 들일 것! 생과일 주스 같은 로컬 워터를 쓰는 음료도 조심하자. Tip 2. IT ITEM 1회용 변기커버 - 김태연씨가 인도를 갈 때 꼭 가져가는 물건. 이것 하나면 위생과 편리함을 동시에 잡을 수 있다. 특히 인도의 변기는 표면에 잔 흠집이 많아 거칠기 때문에 더욱 유용하게 쓰인다고. 1000원샵에서 판매하고 있다. 얇은 이불보 - 침대가 깨끗하지 않은 숙소, 기차, 버스 등 얇은 이불 보 하나면 어디서든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가져가지 보다 현지에서 큰 스카프를 사는 것이 실용적이다. 교통 - 태연씨가 주로 이용하는 것은 기차. 그 중에서도 침대칸을 애용한다고 한다. 침대칸은 이용하기 전 꼭 물티슈 같은 것으로 꼭 닦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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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역사 , 그랜드 투어에서 책임여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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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도 역사가 있을까?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는 어느 것 하나 과거가 숨어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혹자는 여행은 집을 떠나 돌아다니는 것인데, 원시시대 때부터 있던 것에 무슨 특별한 역사가 있냐고 묻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즐기고 있는 여행이라는 것이 근대의 발달과 함께 대중화되어 온 과정을 살펴보면 분명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은 여행의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유럽의 근세가 들어설 무렵인 18세기 중반, 귀족과 신흥 부르조아 계급, 즉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뼈대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교양 교육을 마치고 사회에 나오기 전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으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영국과 북유럽의 왕족 자식들은 자신들 문화의 뿌리를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찾고자 여행을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삼았습니다. 이들은 부유층이긴 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을 날아간다는 것은 당연히 꿈도 꿀 수 없었고, 철도도 아직 탄생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마차를 고용하여 여정을 떠났습니다. 숙박 시설도 고급의 호텔들은 발전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여인숙과 같은 나그네 숙소를 이용하였습니다. 당연히 불편이 따라 왔고, 때론 건강과 안전이 위험스럽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 과정을 인생의 징검다리를 넘는 중요한 경험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여행을 '그랜드투어(grand tour)'라고 불렀습니다.근대 여행의 아버지라 불릴만한 토마스 쿡은 19세기 중반, 철도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패키지여행을 조직하게 됩니다. 그랜드투어가 비로소 근대 문명의 이기 위에서 올라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패키지투어를 통해 수요의 예측이 가능해지자 여행에 필요한 여러가지 서비스들이 표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여행 수요자를 대상으로 하는 레스토랑과 식사, 숙박업소, 교통 시설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또한 여행 시장을 상류층이 아니라 중산층까지 넓히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됩니다.제1차 세계대전은 다시 한번 여행의 형태를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바로 전쟁을 위해 쓰였던 비행기가 일반인들의 여행 목적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여행은 유럽이란 지역을 넘어서기 시작했고, 유럽 문명권 밖인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로 다니기 시작합니다. 또 한 가지, 이런 여행을 하는 주류로 대학생 층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과거 귀족의 자제들에서 젊은 지식인들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법으로 여행을 선택한 것입니다. 60년대 독일의 국민차 무당벌레(폭스바겐)를 끌고 유럽을 방랑한 모습은 이 즈음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73년 젊은 영국인 토니휠러와 그 여자친구 모린은 런던을 출발하여 육로를 따라 유럽, 아시아, 호주까지를 여행하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여행기를 묶어 싱가포르의 한 인쇄공장에서 작은 책자로 엮어내게 되는데, 옐로우 바이블(Yellow Bible)이라 불리는 론리플래닛(Lonely Planet)의 시초가 됩니다.우리나라에서는 80년 중앙대 복학생이었던 박경우씨가 고모의 초청장으로 여권을 받은 후 일본과 동남아를 배낭여행하고 쓴 '배낭족'이란 책이 출간되면서, 그랜드투어의 유산을 한국에 뿌린 시초가 되었습니다. 물론 50년대 김찬삼선생의 세계일주 여행기가 있었지만, 한국 배낭족의 뿌리가 박경우씨라는데는 많은 여행가들의 이견이 없는 상태입니다.그리고 21세기, 이제는 여행이 첨단 디지틀기기와 무장되었고, 또 환경, 빈곤의 문제와 결합되기 시작했습니다. 휴대폰과 인터넷은 여행의 본질을 되묻게 합니다. 왜냐하면 여행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인데, 이 두 장치는 더욱 익숙하게 연결시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방인의 발이 많을수록 그 지역의 문화와 생태는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책임여행(responsible tourism)과 그린투어가 새로운 여행 문화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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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배우 최일순의 세계일주...2077일간의 잊지 못할 소풍
[인터뷰] 배우 최일순의 세계일주...2077일간의 잊지 못할 소풍
[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처음부터 그와의 인터뷰는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인도로가는길'의 제2대 촌장인 심바를 통해 소개 받았을때만 해도 여행을 좋아하는 술집 주인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반전은 금방 왔다. 긴 곱슬머리를 뒤로 묶은 채 대금을 부는 그의 모습은 영낙없이 나그네를 떠올리게 할만큼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그 이후로 늦은 시간까지 밤하늘이 열린 작은 마당 한 가운데 조그만 원탁에서 막걸리와 생두부 몇 조각에 김치를 얹어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선 그의 간단한 이력을 공개한다. 눈치 챘겠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다. 특히, 여행에 대한 그의 프로필은 일반적인 여행자들에게 다소 생소한 느낌마저 들게 할 것이다. 그를 자세히 보면 중남미 혹은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서 이제 막 온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아마 오랜 여행탓에 세계인의 모습을 조금씩 닮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외모는 그렇게 탈 한국인의 모습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는 분명 한국인이었다.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난 그는 자연인 최일순에서 배우 최일순이 되기위해 서울예대 연극과를 입학하고 졸업 전 소기의 목적을 이룬다. 1987년부터 연극, 영화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평생 배우로 살 결심을 하지만 10년을 못 채우고 청춘을 오롯이 바친 서울을 떠난다. 잊고 있었던 푸른 별과 꿈을 동시에 보다 그가 둥지를 튼 곳은 강원도 정선의 골짜기에 있는 움막이었다. 당시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움막을 뜯어내고 집을 지었다고 한다. 사진을 찍으면 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가 되는 아름다운 골짜기가 마음에 들어 정착한 그 곳은 이제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서울을 떠나 강원도 산골짜기에 집을 짓고 살던 그가 갑자기 여행을 시작한 동기는 무엇일까? “어느 날 저녁하늘에 빛나는 무수히 많은 별들을 보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꿈들이 반짝거리기 시작했어요. 매연과 오염물질로 가득한 서울의 밤하늘에서는 한 번도 본적 없는 별들이지만 그 별은 분명 내 머리 위에 떠 있었던 것이죠. 내 꿈도 그랬어요.” 배우 최일순은 마침내 시골 하늘에서 별과 꿈을 동시에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주저 없이 배낭을 꾸렸다. 첫 여행지 캐나다에서 느낀 자유와 희열 처음으로 나간 목적지는 캐나다였다. 밴쿠버와 로키를 여행하면서 그는 진정으로 자신이 되는 것을 느꼈다. 시작부터 목적이나 목표를 갖고 떠난 여행이 아니었다. 그냥 발길 가는대로 자신의 지문과 족적이 없는 처녀의 땅을 밟고 싶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자유와 희열이 몰려왔다. 여행을 통해 그는 다시 태어났다. 한국에서 아주 오랫동안 켜켜이 쌓였던 세포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세포가 자라기 시작했다. 캐나다를 돌아보면서 그는 여행이 주는 무엇인가를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마트에서 절대 살수 없는 무형의 가치와 세계 그리고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가면을 벗고 자연이 준 진짜 얼굴찾기 한국에 돌아 온 그는 정선의 산 속으로 들어가 칩거한다. 그리고 일정시간이 흐른 후 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배우는 차츰 자신이 썼던 가면을 벗고 자연이 준 진짜 얼굴을 하나씩 되찾는다. 동남아, 인도, 티베트, 네팔, 중국, 몽골을 차례로 여행 하면서 그는 어느새 남이 가지 않은 땅을 밟고 있었다. 여행을 시작한지 7년 만에 그는 오지여행 인솔자로 활동한다. 길잡이로서의 최일순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지만 여행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얻게 된 일이었다. 그는 ‘최일순과 함께하는 세계여행’ 팀을 인솔하며 여행자들에게 새로운 인상을 심어주었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함께 하는 여행으로 바뀐 것이지만 여행의 본질은 변할 수 없었다. 하늘, 땅, 물의 길은 하나기에 여행자의 수가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소풍 떠나는 길 통해 시인을 만나다 그는 여행하는 것을 ‘소풍 떠나는 것’에 비유한다. 바로 고 천상병 시인의 작품 ‘귀천’에 나오는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을 생각해서 한 말이다. “친구가 준 천상병 시인의 시집 한 권을 들고 무작정 인사동으로 찾아갔는데 시인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대신 시인의 부인이신 목순옥 여사님을 만났어요. 그날 이후 틈만 나면 인사동 찻집을 찾아갔고, 온 종일 찻집에 앉아 벽에 꽂힌 시집을 읽었어요. 그러다가 시인이 퇴원을 한 후 나들이를 돕게 되었습니다.” 처음 본 시인이었지만 낯설지 않았다. 그는 이미 찻집에서 시인의 시를 모두 읽었고 여사를 통해 시인의 모습을 가슴 속에 품기 시작했다.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시인으로부터 “나는 자식이 없는데....늬가 내 자식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시인의 자식이었는지 모른다. 시인과의 부자 인연은 그때부터 돌아가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마 소풍을 마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시인이 ‘소풍을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노래 한 것처럼 그 역시 수많은 소풍 길을 통해 푸른 별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먼 훗날 귀천에서 만나게 될 시인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길은 그에게 친구가 된다 배우 최일순의 가슴에는 시인의 노래가 그대로 들어있다. 그래서 그의 여행은 쇼핑이나 관광과는 거리가 멀다. 시끄럽고 떠들썩함 보다 조용하고 청아한 나홀로 길 떠나기를 즐겨한다. 길 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 떠남이 두렵지 않고 외롭지 않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길은 언제나 친구가 된다. 올해 그는 러시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바이칼호와 모스크바 궁,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톤 체호프, 알렉산드르 푸슈킨, 레프 톨스토이,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막심 고리키, 미하일 숄로호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떠오르게 만드는 나라, 러시아에서 최일순의 소풍 길은 계속될 것이다. [인터뷰 후일담] ‘최일순의 푸른별 이야기’를 시작하다 대화가 끝나고 원탁 위에 있던 막걸리와 두부도 떨어졌을 때 그에게 부탁을 했다. 푸른별이야기를 트래블아이에 싣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는... 형형한 눈빛의 그는 단박에 ‘그러시죠’한다. 이렇게해서 트래블아이의 첫 번째 트래블로거가 탄생되었다. 다시 한 번 그의 흔쾌한 답에 감사를 보내며 기분 좋게 ‘최일순의 푸른별 이야기’를 연재한다. 그의 거친 여행기를 보고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선한 정보는 물론 감동까지 공유했으면 좋겠다.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는 선물로 ‘푸른별이야기’와 솟대를 그려주었다. 앞으로 푸른별 지구의 흥미롭고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이 트래블아이의 ‘푸른별이야기’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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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윤병옥 합기무도 관장...화랑도-궁중무도-호신무도를 이어받은 대한민국 종주무술
[인터뷰]윤병옥 합기무도 관장...화랑도-궁중무도-호신무도를 이어받은 대한민국 종주무술
60여년 동안 평생을 바쳐 우리의 종주무술인 ‘합기도’를 연마하고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무도인이 있다. 주인공은 바로 캐나다의 영웅 윤병옥 관장이다. 그에게 ‘합기도’란 무엇이고 캐나다에서 43년 동안 합기도를 가르치며 무엇을 이루었는지 들어보았다. 윤병옥 관장의 합기무도는 어떤 운동인가요? 제가 수련해 온 '합기도'는 우리의 정통무술인 '태권도' 와 같은 우리 대한민국 종주무술의 한 종류입니다. 삼국시대 때 신라의 '화랑도'정신 속에서도 수련했음을 '도'를 행한 기록들 속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우리가 그 후예 임을 당당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왕을 모시는 '궁전'안의 호신무술로 일부 만이 배웠답니다. 그렇다 보니 평민들에겐 널리 알려지지를 못했습니다. '귀족'과 지금의 경호원들이라고 할 수 있는 특수층만이 궁전 안에서만 연마하고 수련을 허용했던 '궁중무술'로 정착했습니다. 그 후 왕을 섬기는 신하들만의 '소유물'인 족술, 권술, 유술, 관절꺽기술, 지압술, 활법, 그리고 단전호홉법 등으로 엮어진 '호신무도'로내려오던 중 오늘에 이르러서 '합기도'라는 이름으로 정착된 것입니다. 지금의 태권도도 그 옛날 공수도, 당수도 수박도 등으로 변천 역사가 있듯이 말입니다. 언제부터 합기무도와 인연이 되었나요? 저는 원래 이북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6.25전란을 통해 1.4 후퇴 때 이남으로 피난을 내려오게 되었지요. 그 당시 내 고향 황해도에서 국민학교( 인민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리의 전통 운동인 '씨름'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이북의 단오(5월 운동회)때 벌어진 시합에서 연거푸 우승을 거둬 상품들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때 학교에서는 저를 당해낼 학생들이 전무후무 했지요. 이렇게 운동에 남달리 취미를 가진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피난을 하던 1950년대는 자유당시절 깡패들이 골목과 거리를 메우고 있던 폭력과 무질서 속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어요. 하루는 신문배달(동아일보) 을 하던 중 동네의 깡패들과 싸움이 붙었는데 처음으로 그들에게서 당수도, 공수도를 알게 되었고 그 때부터 합기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에서 합기무도 도장을 하게 된 계기는요? 처음 합기도 도장은 한국에 있었어요. 서울 종로5가 (극동빌딩2층)에서 1965년 합기도장을 처음 개관하여 가르쳤고 1967년에 신촌 로터리로 "도장"을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그곳의 대학가(연세대, 홍대, 이대, 서강대) 학생들을 상대로 운영해 왔습니다. 그 후 1975년 3월에 이곳 캐나다 알버타 캘거리로 이민 정착과 동시에 합기도(윤무관)도장을 열고 현재까지의 43년의 역사를 이어지고 있답니다. 헤아려보면 모국의 서울(종로와 신촌)에서 도장을 운영한 순간부터 합기도 사범으로 캐나다에 이민(독립이민) 와 이곳에서도 합기도 도장의 인연들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는 대한민국에서 20년 간 했던 도장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이곳 캐나다까지 43년을 합해서 총 60여년의 합기도 무술도장 경험과 경력들이 있는 셈입니다. 합기무도를 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위에 상술한대로 나에게는 (중학교, 고등학교 , 대학) 시절들을 통해서 집안의 가난한 형편때문에 거의 ‘고학생’ 신분으로 자수성가의 길을 걸었지요. 체육관의 부사범직과 사범의 길은 물론 개인지도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운동을 취미로 시작한 나는 졸업한 후에도 곧장 무술체육관을 개관했으니 다른 직장은 알아 볼 수조차 없는 오직 합기도 도장 운영만으로 오늘을 맞고 있답니다. 캐나다에는 몇 개의 도장이 있나요, 또 한국본부와 세계 합기무도 도장 등에 대하여 설명해 주세요? 현재 캐나다에는 3개의 도장이 있으며 나의 제자들이 운영하는 미국 뉴욕과 텍사스(Elpaso) 그리고 불란서와 기타 유럽지역에도 산재하고 있습니다. 한국본부는 현재 서울에 있습니다. 또한 세계합기도 ‘윤무관’ 총본부를 이곳 캐나다 두고 미래의 우리 윤무관 합기도의 ‘Vision’을 향해서 매진하고 있습니다. 합기무도는 어떻게 국위를 선양 하고 있나요? 네. 우리 모국 ‘대한민국’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교민들이야말로 진정한 모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입니다. 저의 경우도 체육관 ‘Yoon's Martial Arts School’ 도장 안에는 벽에 대형 ‘태극기와 캐나다국기’ 만이 전체 벽을 차지하고 있지요. 그리고 체육관을 드나드는 수많은 관원들이 들어오고 나갈 때면 앞에 걸려있는 ‘국기’ 앞에 바른 자세로 ‘경례'하도록 예의를 가르친답니다. 만약 그 예의를 지키지 않는 관원은 결코 출입을 ’불허‘ 합니다. 이것은 불문률로 정하고 있으며 그리고 국기 앞에 한국말로 ’쉬엇‘ ’차렷‘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그 밖에 기본적인 동작과 후령도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숫자들을 셈(Count-Down) 할때도 한국말로 하나, 둘, 열까지 세도록 하고 있습니다. 관원들은 이렇게 슷자들을 모두 한국어로 외워야 합니다. 물론 앞에 있는 칠판에는 분명히 숫자들을 한국어와 영어로 표기해 놓습니다. 많은 유단자( Black- Belts)들 또는 관원들도 우리 종주국의 ‘합기도’를 배우면서 한국말이나 한글을 배우려는 관원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합기도 유단자의 실력으로 종주국인 대한민국을 방문하는 ‘그 날’이야말로 그들이 소망하는 것들 중에 가장 큰 기대와 목적임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사정으로 또는 역부족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감당치 못하고 오직 기초적인 우리운동의 기본자세이름들만 한국어로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합기무도의 전망은요? 저는 이곳에 정착한 이후에 매년 한 번씩 치르고 있는 ‘Hapki-Do Champion-Ship’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지난해도 (2017년) 제33회 챰피온 토너멘트를 대 성황리에 마쳤음을 말씀드릴수가 있습니다. 매년 거듭하고 있는 우리 합기도의 본 대회는 많은 사람들의 성원을 받아 매년 참가자들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지난 제33회 (11월18 토 2017) 에도 참가 선수들이 200명이 넘을 만큼 대성황을 이루는 대회였고 그들의 부모나 친지들, 친구들로 관중석은 만석을 이루기도 했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33회의 대회를 진행하면서 한해도 빠짐없이 어려움들을 감수하고 지켜온 인내와 경륜의 결실임을 말 할 수 있습니다. 올해(2018년)에도 제34회를 오는 11월에 이곳 실내체육관(The Genesis Center)에서 개최할 예정이랍니다. 제가 보는 우리 합기도를 통한 세계한글보급이야말로 희망적임을 말씀드릴 수가 있을 것 같군요. 왜냐하면 제가 전수하고 있는 합기도의 전통이야말로 어제와 오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강산이 4번이나 변했다는 43년의 시간에서 오늘의 현실을 말해주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간단히 우리의 매 대회 때의 ‘OPEN CELEMONY’ 를 표현한다면 우리의 "애국가"(1절~4절)를 부르는 동안 우리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체육관 내 스피커를 통해서 발맞추는 퍼레이드(Parade)가 시작됩니다. 어린 관원들에 의해 대형 ‘태극기’가 실내를 돌고 있는 동안 수 천명의 관중들은 자리에서 모두 일어납니다. 그리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관원들이 오른손을 합기도 도복 왼쪽 가슴에 얹고 조용한 침묵 속에 끝나면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옵니다. 이 나라 캐나다는 세계 여러 나라들의 ‘소수민족’들로 이루어진Multi- Cutural Canada 이지요. 저 역시도 소수민족 대한의 아들로 태극기와 애국가를 목 놓아 부르는 이 모습은 나의 모국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애국’ 하는 증표입니다. 또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 개인으로 ‘43년’이나 보내며 숱한 세월들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50여 년 전에 운동(합기도)을 계기로 ‘여운일 목사님’을 만났고 "상면의 해후"로 세계를 향한 ‘한글보급’에 역사적 사업을 위한 ‘사명’을 받고 함께 합력해 ‘세계문맹자들을 한글’로 퇴치하는데 뜻을 함께 합니다. 광화문 앞에 앉아계신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훈민정음의 큰 뜻과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신 ‘이순신장군’의 얼을 반추하여봅니다. 이제 우리의 합기도무술을 통해서 세계를 향한 한글보급에 보탬이 될 수 있음을 전망해 봅니다. 지금은 스마트 폰 시대입니다. 지구촌 식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손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자기술정보시대에 한글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관장님께서는 40년간 합기도를 보급하면서 한글보급은 어떻게 하시고 계십니까? 이곳 캐나다에서 저는 합기도 보급을 43년이나 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무술을 통해서 솔직히 한글보급은 못하고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겨우 외국인인 나의 제자들에게 ‘한글’을 대신한 한국 언어들을 영어Spelling으로 겨우 외우게 하고 표현시키는 것뿐입니다. 합기무도와 한글보급을 접목해서 보급한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전문성이 전혀 없는 저로써는 적당한 방안이나 방법들을 말씀드리기엔 역부족입니다만 제 생각에는 저의 무술 ‘합기도’로 우리 대한민국 종주국의 무술 ‘합기도’를 나름대로 알리고 보급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습니다. 저희 체육관 도복이나, T~Shirt, 합기도 체육관 모자들, 그리고 합기도 대련(겨루기)때 착용하는 용품들의 표기들을 ‘합기도’라는 한글로 프린트를 하여 그들이 입고 걸치고 쓰고 거리를 활보 한답니다. 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한문이 그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한글’로 표시한 옷들과 용품들이 많은 사람들과 합기도 관원들에게 상당히 주목을 받고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문성으로 좀 더 서로가 머리를 맞대고 착안 등을 해내고 만들어 낼 때 우리의 ‘세종대왕’께서 뜻하신 세계를 향한 문맹 퇴치도 분명 성공의 결실들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도장을 운영하면서 기뻤던 일과 힘들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이민자들의 생활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우선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이민자들의 서러움과 괴로움들은 비단 나만이 겪는 일들은 아닙니다. 나는 독립이민(합기도사범)으로 이곳에 정착 해 1975년 도장을 개관하면서 이곳 원주민들이 다니던 도장들과 기존 타 무술들과의 ‘암투와 질투, 도전’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 신념인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이곳에서 43년을 버틴 것입니다. 그 고통의 시간이 결코 한두 마디로 표현될 수 없겠지요. 반면에 기쁘고 보람된 일이라면 그런 속에서도 우리 체육관에 들어온 관원들에게 ‘인성’을 가르치고 길러내는 합기도 사범의 위치에서 마약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에 빠진 어린 청소년들에게 합기도 무술을 통해서 치료받고 새 삶을 찾게 해 준 것입니다. 그들이 내 가르침과 훈련을 통해 White-Belt( 흰띠)에서부터 Black-Belt(유단자)가 되었을 때 검은 띠를 허리에 매주고 자격증들을 수여 할 때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가정은 물론 한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기 위해 그들의 미완성한 인생을 ‘완성’의 길로 찾아가게 하고 변화된 모습을 보는 것이야말로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비록 시작과 처음은 작고 미약할지라도 나중은 너로하여금 창대케 하리라’하신 말씀대로 오늘까지 매년 이곳에서 ‘합기도 챔피언대회’를 치르게 도우심으로 ‘33회’를 맞아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우리의 국기 ‘태극기’를 흔들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세계를 향한 합기도 대회를 일취월장으로 개최하게 됨은 나에게는 최상의 기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사활동은 하고 있나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곳 교민들의 개척교회를 상대로 운동을 통한 하나의 ‘봉사’ 할동을 정기적으로 해왔지요. 한국어로 합기도와 태권도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나이와 체력이 역부족이라 뒷전에 물러나 있고 후배나 제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이 사회의 봉사나 Charity를 이곳 Childen-Hospital에 또는 도움들이 필요한 각처의 Community에 우리의 합기도 챔피언 대회 수입금으로 들어온 기금들과 입장료들을 기부하고 있습니다. 또 아동병원이나 사회에 기증해오던 Charity기금들을 몇 년 전부터는 우리 체욱관의 ‘장학금(Scholarship)’ 제도를 설치하여 불쌍한 청소년들을 상대로 저희나름대로 행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또한 합기도 운동을 연마해오면서 그 옛날부터 ‘침과 뜸’ 그리고 ‘지압’들로 이곳에서 부업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Yoon;s Acupuncture &Acupressure Clinic은 Ritire를 했으며 오직 나의 관원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침과 뜸으로 자연치료가 필요한 이들에게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한글세계화 운동연합 서부 합기도 캐나다본부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함께 할 의양은 있는지요? 물론이지요. 부족한 저의 힘이지만 합기도를 통해서 일익을 담당케 하시고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나의 남은 여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새해계획은 무엇입니까? 컴퓨터세대, 전자기술정보시대를 맞아서 도외시 되어 가는 우리의 종주 무술인 ‘합기도와 태권도’의 위상이 차츰 도태되어 가고 있고 정통무술정신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이에 청소년들을 향한 나의 운동인 합기도를 통해서 ‘SOUND BODY, SOUND MIND’로 세계를 향하고 싶습니다. 그 계획 중 하나인 금년(2018년)11월 제 ‘34th Annual HAP KI-DO Champion-Ship’을 변함없이 개최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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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교 민상기총장, 21세기 대한민국을 빛낸 한국인상 수상
건국대학교 민상기총장, 21세기 대한민국을 빛낸 한국인상 수상
[트래블아이 최치선 기자] 건국대학교 민상기총장은 지난 22일 오후 2시,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을 빛낸 한국인상, 교육혁신 글로벌리더 공로대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창립 25주년을 맞이한 민주신문 한국인물대상위원회가, 교육부문에서 타의 귀감이 되며, 국가와 인류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높이 치하하여 수여한 영예로운 상이다. 강상숙 민주신문 회장은, “한국인상은 언론매체를 통해서,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인 저명인사와 이웃과 사회에서 귀감이 되는 숨은 공로자를 찾아내어 공적을 치하해 주는 상입니다. 국정이 혼란스럽고 국가경제가 어렵지만, 교육은 백년대계입니다. 건국대학교의 민상기 총장님은 건국대학교를 세계 혁신기관으로 만들고 있는 교육혁신의 선구자이시며, 참교육자이십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을 빛낸 한국인상 수상자인 민상기 총장님처럼 자기분야에서 묵묵히 길을 가는 어른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가 밝아지고 희망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하고, 민상기 총장이 교육혁신리더로 지나온 길을 높이 치하했다. 민상기(62) 총장은 “한국 대학이 사회변화에 능동적이지 못한 점을 인정합니다. 특히 인성교육의 부재로 사회 구석구석이 어둡습니다. 전인적인 인격의 지성인, 미래지향적인 전문인, 공동체발전의 선구자를 양성하는 교육발전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민주신문 창립 25주년을 축하드리며, 21세기를 빛낸 한국인 상을 수상하게 되어 기쁩니다. 한국인상은 제 개인의 상이 아니라 건국대학교와 건국 인들이 세계 혁신대학교로 거듭나라는 힘을 주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사회와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더욱 힘쓰겠습니다.”하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다음은 시상식장에서 만난 민상기 총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교육혁신, 프라임(PRIME) 건국 2020은? 총장 취임 전부터 프레임사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총장에 취임하고 난 뒤 ‘프라임(PRIME) 건국 2020’이라는 비전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세우고, 세계를 품는 대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놓고, 교육혁신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학부·학과의 칸막이를 걷어내면서 관련 단과대학을 통·폐합했고, 산업체 인턴 등 현장실습을 의무화한 플러스 학기제를 도입했습니다. 지능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는 4차 산업혁명과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크로스오버(융·복합)인재’를 양성하여, 2020년까지 ‘국내 5대 사학, 아시아 100대 대학’ 진입을 목표로 산업의 변화와 학생 수요에 맞는 대대적인 혁신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국가정책사업으로 선정된 선도대학의 성과는? 국가정책사업인 프라임사업(PRIME)의 선도대학으로 선정되어 480억 원의 국고지원을 받았습니다. 산업계와 학생들의 수요를 고려한 산업수요 맞춤형 인재양성을 하는 바이오와 ICT(정보통신기술) 분야에 특화한 ‘KU융합과학기술원’을 설립했습니다. 링크플러스(LINC+·사회맞춤형 산학협력 선도대학, 5년 250억) 육성사업 선도대학으로 선정되었습니다. ‘4차 산업 혁명을 선도할 힐링바이오 산업 전문 인력 양성’을 목표로 바이오 분야의 융합교육에 새 지평을 열고 있습니다. 세계최대 뉴스제공 기업인 로이터가 발표한 아시아 최고 혁신대학으로, 2년 연속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축적된 연구역량과 학문적 강점을 살려 미래 융복합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팩토리와 첨단 토론식 강의실 오픈 프라임 사업의 지원으로 학생들의 다양한 창의적 아이디어를 발굴·공유하고, 학생 창의 공간인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를 오픈했습니다. 첨단 장비들을 갖춘 토론식 강의실을 구축하는 등 교육 인프라와 교육환경을 대폭 업그레이드 했습니다. 스마트 팩토리는 타 대학의 지속적인 벤치마킹이 되고 있으며, 재학생 만족도가 크게 향상되어 학생창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프라를 바탕으로 토론식 수업, 플립드 러닝, K-MOOC 과제 등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교육혁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건국대학교 혁신 키워드는 통합과 융합 건국대학교의 혁신 키워드는 통합과 융합입니다. 학생들이 4차 산업혁명이 요구하는 창의력을 발휘하려면 철옹성 같은 학과 간의 문턱을 낮추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과대 학부 10개를 4개 학부로 통합하고, 동물생명과학대학과 생명환경과학대학을 통합하여 ‘상허생명과학대학’이라는 바이오 중심 단과대를 만들었습니다. 신설 KU융합과학기술원을 융합형 인재 양성의 산실로 키워나갈 계획입니다. 인문사회계열의 정치대학·상경대학·글로벌융합 대학 등 3개 단과대도 하나로 통합할 예정입니다. 소통중심의 커뮤니케이션 행정 구현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간담회, 설명회 등을 적극 활용하여 구성원과의 활발한 소통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단과대에서는 ‘김밥’ 조찬 간담회, 부처별 행정직원은 ‘아이스크림’ 간담회, 글로컬 캠퍼스에서는 주별 방문 간담회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제도적으로 단과대학별 교학소통위원회를 설치하여 각종 현안에 대하여 사전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파티션 없애기‘ 소통 캠페인은 부서 간 협조와 소통강화를 목표로 시행하고 있으며, 의사소통 및 업무 처리 속도 향상의 성과 도출하고 있습니다. 자기주도 창의활동으로 ‘드림학기제’ 시행 2017년 본격 도입한 ‘드림학기제’는 학생 스스로가 창의활동 과제를 설계해 제안하고 수행하는 프로그램을 정규 과목입니다. 현장실무를 통해 학기를 이수하는 다양한 ‘플러스(PLUS) 학기제도’ 로, 학생 주도 커리큘럼 설계를 통한 수요자 중심의 교육 서비스 제공을 위한 ‘7+1 자기설계학기제’입니다. 건국대학교는 학생들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도전하고, 진로에 대한 방향설정과 자신감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융합과학기술원, 학사-석사 연계한 교육혁신 선도 신입생 333명이 입학한 ‘KU융합과학기술원’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한 대학의 교육혁신 대표 사례입니다. U융합과학기술원에는 바이오·ICT·미래 에너지 분야를 중심으로 ①미래에너지공학과 ②스마트운행체공학과 ③스마트ICT융합공학과 ④화장품공학과 ⑤줄기세포재생공학과 ⑥의생명공학과 ⑦시스템생명공학과 ⑧융합생명공학과에서 관련 분야 전문가를 육성하고 있습니다. 건국대학교는 KU융합과학기술원을 통해 전통적 강점 분야인 생명 과학 분야와 공학 분야를 중심으로 차별화된 융합기반 교육과정을 제공합니다. 국내외 타 대학에서 양성하지 못하는 미래형 고급인재를 지속적으로 양성하고 있습니다. 4차 산업 혁명시대에 창의성 교육의 중요성은? 건국대학교에서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교육으로 정답이 무엇(What)인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How)구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래사회의 학생들은 단순한 지식을 암기하는 것보다 공감 능력과 도덕성, 의사소통능력, 문제해결 능력 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기업들의 인재상도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인문학적 소양(가치와 물질의 균형), 소프트웨어적 지식, 전문성, 상상력과 창의성, 더불어 사는 인성 등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건국대학교의 이념과 비전은? 건국대학교 설립자 상허(常虛) 유석창 박사는, 건국대의 핵심발전 분야로 농업과 과학 분야에 주력하여 대한민국의 교육발전에 중추적이고 헌신적인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 유지를 받들어 저는 취임사에서 전통과 혁신의 건국 100년이라는 주제와 함께 국민에게 존경받는 명문 사학, 폭넓은 장학제도로 학생들과 함께 성장하는 대학, 가치연구와 실용연구가 조화된 연구중심대학, 기업과 산업계에서 인정받는 취업·창업 브랜드 대학이라는 비전을 내놓았습니다. 외국인 유학생 다양화와 해외캠퍼스 구축을 통한 '글로벌 원 캠퍼스', 대학이 보유한 자산과 역량을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감과 공유의 열린 대학 등 10가지 약속과 비전도 내놓았습니다. 교수, 교직원, 학생, 동문 등이 모두 힘을 모아, 품격 있고 내실 있는 명문사학으로 가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민상기 총장은 누구? 경기도 양평 출생이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호헨하임(Stuttgart-Hohenheim)대학교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건국대 교수로 재직하며 교수협의회 회장, 대학원장, 교학부총장, 산업연계교육 활성화 선도대학(프라임) 사업단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축산식품학회 편집위원장과 전국식품공학교수협의회 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식품냉동기술협의회 회장과 프라임사업 대학협의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와 중동 등 저개발국 농축산 기술 교육 원조를 위해 2014년 설립한 'KU국제개발협력원' 원장을 맡고 있다. 농축산 식품과 바이오 생명과학 산업 분야에서 활발한 학술 연구와 대내외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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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상 무형문화재...물과 불과 정성으로 빚은 삼해주
김택상 무형문화재...물과 불과 정성으로 빚은 삼해주
서울을 대표하는 술 삼해주(三亥酒)는 가양주(家釀酒·집에서 담근 술)다. 세 번에 걸쳐, 최단 36일 최장 100일에 걸쳐 담그는 소주, 즉 증류주다. 12지신 중에서 피가 가장 붉고 맑다는 돼지가 들어간 새해 첫 돼지(亥)날 밑술을 담그기 시작해 다음 해일 또는 다음 달 첫 해일에 덧술을 담가 합치고, 또 그다음 달 해일에 2차 덧술을 담가 합친 후 숙성시켜 증류하여 만든다. 이렇게 삼해주는 정성도 많이 들어가고 맛이 좋아 조선시대 궁중과 양반가에서는 물론 조선 후기에는 일반 가정에서도 제사와 손님 접대용으로 쓰인 최고급 술이다.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명주지만 서울 북촌에 가면 삼해주를 직접 담그는 법을 배우고 맛볼 수 있는 삼해주 체험공방이 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8호 삼해주 소주장인 이동복 여사의 아들인 삼해주 기능보유자 김택상(63) 선생이 직접 가르치고 제조한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삼해주의 장인이 된 김택상 전수자를 만나기 위해 북촌 공방으로 갔다. 조선시대 외국사신들이 가져가는 명주“고려말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 전성기를 이룬 삼해주는 한양 사대부집안에서 마시던 술입니다. 사신들도 중국에 갈 때 가져가는 술로 삼해주를 꼽을 정도로 명주였습니다. 삼해주는 밑술 하나로 막걸리와 약주, 소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한 번에 3가지 종류의 술을 맛보게 됩니다. 삼해주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온도입니다. 1년 내내 상온을 유지하는 저장고가 있다면 지금도 삼해주의 완벽한 맛을 재현 할 수 있습니다.”김택상 씨는 술 내리는 것을 ‘도수’라 하는데 도수의 회수에 따라 막걸리(1회)->약주(2회)->소주(3회)로 만들어 진다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술을 3가지로 볼 때 막걸리는 밥, 소주는 술, 약주는 반찬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막걸리는 밥 대용으로도 먹었던 것입니다. 금주령이 내렸을 때도 환자에게 먹일 약주를 만들게 해달라고 할 정도였습니다.”인터뷰 중간에 공방 직원이 삼해주를 가져왔다. 가까이서 본 삼해주의 빛깔은 투명한 노란색인데, 사선으로 비껴드는 여린 아침 햇살을 보는 것 같다. 술잔 위로 올라온 누룩내가 코 끝에서 부유하지만 그 향이 사람을 밀어낼 만큼 역하지 않고, 사람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살짝 맛을 보니 혀를 간질이는 톡 쏘는 느낌이 있고, 쓴맛이 돌며 약간 신맛도 스치는데, 대체로 술맛이 깔끔하고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가업 잇기 위해 직장 그만두고 삼해주 복원 삼해주의 역사는 깊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가 1168년 쓴 <동국이상국집>에도 등장한다. 조선시대 문헌인 <음식디미방> <산림경제> <동국세시기> 등에도 등장한다. 20세기 초까지 술도가가 밀집해 있던 한강가 마포나루 부근의 공덕동과 아현동에서 많이 빚어지던 술이 삼해주였다. “삼해주는 위에 뜨는 맑은 술을 약주라 하고 약주를 증류하면 삼해소주가 됩니다. 여기서 삼해 막걸리는 약주에 나머지를 물과 섞으면 얻을 수 있는데 장기보관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반면 소주는 장기보관이 가능하죠. 삼해소주는 우물가의 버들가지에 새순이 돋을 무렵 마신다 하여, 버들가지 꽃을 뜻하는 유서주(柳絮酒)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일제 때도 이어져 오던 삼해소주의 맥이 끊길 뻔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가정에서 술 빚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이동복 여사)가 맥이 끊기면 안 된다면서 조심스럽게 술을 빚어왔습니다. 그러다가 서울시에서 삼해주 전통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1993년 어머니를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했습니다. 당시 저는 직장을 다녔는데 가업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직서를 내고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삼해주 복원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대량생산 어려워, 주문판매 방식 소량생산어머니의 뒤를 이어 무형문화재가 된 김택상 씨는 그동안 익혀 온 솜씨로 삼해주를 재현했는데 만족도는 70%정도라고 밝혔다. “모든 조건이 맞춰질 때 저도 어머니가 만든 삼해주만큼 훌륭한 술을 빚어낼 때가 있어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앞으로 좀 더 연구하고 노력하면 목표한 결과가 나올 것 같아요.”삼해소주는 숙성기간이 길어야 맛있는 술이고 건강주가 된다. 삼해소주는 봄에 마시는 술이란 의미로 춘주, 백일주라고도 불렸다. 우리나라 5대 명주 중 하나인 삼해주는 온도변화에 민감해서 겨울철에 빚어 봄에 마시는 게 좋다. 온도만큼 중요한 게 물이다. 그렇다고 정수기물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수돗물이 낫다. 영양이 풍부한 물이야말로 삼해주의 맛을 결정하는데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물은 암반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삼해주의 대량생산은 어렵다. “도시에서는 사실 생산 자체가 어렵습니다. 밥 짓는 것도 가스불이 아닌 장작불이어 좋고 물도 수돗물보다 지하 암반수가 좋습니다. 그리고 보관도 김치냉장고가 아닌 자연동굴이 적합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갖춘 장소를 서울 같은 도시에서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주를 만들기 위해 시골로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판매는 주문판매 방식으로 꼭 필요한 분들에게만 술을 드리고 싶어요.”적당량 장복시 소화불량 개선, 숙면 효과좋은 술은 우리 몸에 좋은 효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삼해주의 효능은 무엇일까? 적당량의 삼해 약주를 장복하면 소화불량이나 속병 같은 게 어느 정도 개선된다. 또 잠자기전에 한 두잔 하면 숙면을 취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좋은 술을 이웃과 나누고 싶어서 삼해주 빚는 일이 즐겁다고 한다. 앞으로 계획은 삼해주를 전국 최고의 명주로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삼해주 아카데미도 열심히 해서 좋은 제자를 키우고 싶다. 현재 12기까지 배출된 아카데미 제자 중에는 미국와 일본의 교포들도 있다. 삼해소주는 어떤 안주와 잘 어울릴까? “흔히들 소주하면 고기안주라고 생각하는데 삼해소주는 칼로리가 높아서 견과류나 과일 그리고 치즈가 어울립니다. 삼해주를 입안에 머금으면 잘익은 사과향이 나는데 이렇게 맛좋은 삼해주를 만드는 비결은 좋은 물과 불 그리고 정성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좋은 술을 빚기 위해 누룩을 잘 만들고, 날씨와 바람 등을 고려해 술을 안치되 온도와 술독관리에도 최선을 다 해야 하는데 100일 간의 정성을 들여야 하는 삼해주는 엄정한 가풍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일본의 지원제도 부러워, 지속적인 관심필요계속해서 삼해주에 대한 얘기가 진행됐다. 그는 삼해주에 올인 한 이유는 집안대대로 이어져 온 맥을 내가 이어받은 것일뿐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정부의 지원이나 관심은 어느 정도냐고 물어 보았다. “일본에 갔을 때 부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장인들에 대한 지원제도가 아주 훌륭했어요. 작업환경부터 판매 거기다 홍보까지 모든 것이 지원되는 제도는 정말 부러웠습니다. 우리는 큰 전시나 이벤트 때만 관심을 갖다가 끝나고나면 나 몰라라 합니다. 점점 더 우리문화를 지키려는 장인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지고 있는데 그들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결과적으로 전통문화의 맥이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외국인들도 한국에 와서 보고 싶은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라고 생각합니다.”삼해주 담그는 순서 1. 밑술 만들기 The Crude Liquor - 멥쌀을 불려 가루를 낸 후 된 죽을 만들어 식힌다- 식힌 된 죽에 누룩을 첨가, 항아리에 넣고 2- 3일 숙성시킨다. 2. 1차 첫술하기 The 1st Liquor- 멥쌀을 불려 고두밥을 찌고, 누룩과 물, 밑술을 넣어 반죽한다.- 반죽은 하루 2- 3차례 저어주며 30일정도 숙성한다.- 밥알이 뜨고 술이 노란색으로 변하면 1차 첫 술이 완성된다. 3. 2차 덧술하기 The 2nd Liquor- 1차 첫술을 체로 걸러낸다.- 찹쌀을 불려 고두밥을 찌고, 누룩과 물, 1차 덧술과 섞어 반죽한다.- 항아리에서 30일 정도 숙성되어 찌꺼기가 가라앉기 시작하면 2차 덧술이 완성된다 4. 3차 덧술하기 The 3rd Liquor- 2차 덧술 하기와 동일한 공정을 반복한다. - 완성된 3차 덧술을 체에 걸러 항아리에 담아 30일 정도 숙성한다. 5. 약주, 막걸리 Samhae Yakju, Makkoli- 3차 덧술이 완성되면 체에 걸러 위의 청주(淸酒)만 채취하여 약주(三亥藥酒)로 음용한다.- 찌꺼기는 물을 혼합하여 탁주(三亥濁酒 –막걸리)로 음용한다. 6.소주 내리기 Distilling the Soju- 3차 덧술에서 걸러진 청주를 전통 소줏고리를 이용하여 증류식 소주를 내려 음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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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희 이사장..."생명을 살리는 음식은 자연이 준 밥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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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자연요리 전문가인 (사)평화가 깃든 밥상의 문성희(63) 이사장을 충북 괴산에서 만났다. 10년 만에 산에서 내려와 괴산 미루마을에 보금자리를 틀고 자연밥상 전도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만나기 전 ‘<평화가 깃든 밥상> (샨티 간)’을 읽어 보았다. 평화를 찾는 지치고 외로운 영혼들에게 드리는 밥상으로 시작하는 그녀의 책은 단순한 요리책이 아니었다. 20여년 동안 부산에서 잘나가는 요리학원 원장으로서 누렸던 부와 명예 그리고 안락함을 포기하고 산 속으로 들어간 뒤 얻은 자기성찰 에세이집에 가까웠다. 그녀의 밥상에 차려진 소박하지만 생명기운이 가득한 자연 음식을 맛보는 순간 그 뜻을 조금은 이해하게 될지 모른다.‘평화가 깃든 밥상차리기’, ‘자연이 준 그대로의 삶 살기’ ‘생명을 살리는 음식이 무엇일까?’에 대한 그녀의 의문과 탐구는 먹는 음식이 곧 생명이란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어느날 우연히 햇볕과 바람에 말린 생식을 먹게 되면서 몸 세포가 변하고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끼고 영혼이 무엇을 원하는지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요리학원을 떠나 산으로 들어 간 문 이사장은 세상적인 모든 감투를 내려놓고 자연인 문성희로 살게 된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 2010년 그녀는 고요한 산자락 계곡물 소리처럼 낮고 생명력 강한 여자가 되어 세상에 돌아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그녀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생명이 있는 밥상을 화두로 살아온 그녀이기에 세상 사람에게 자신이 얻은 소중한 재산을 나눠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곧 ‘지구를 위한 밥상’과 ‘평화가 깃든 밥상차리기’다. 지난 이십 년 동안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음식을 먹고 가르친 시간을 버리고 그녀는 현재 생명이 넘치는 자연이 준 그대로의 원형질을 존중하는 삶을 살고 있다. 보름 전 자신의 안식처이자 (사)평화가 깃든 밥상 사무실 겸 연구소에서 그녀를 만나 자연식 요리에 빠지게 된 동기와 근황을 들어 보았다. 내 음식의 핵심은 ‘먹는 것이 곧 치유’“ ‘자연요리 전문가’는 2009년 처음으로 쓴 <평화가 깃든 밥상>을 출간하면서 출판사에서 붙인 겁니다. 뭘 의도하거나 계획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자연스럽게 내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자연음식’과 ‘자연요리 전문가’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손사래를 치며 답하는 그녀의 모습 속에서 겸손함과 수줍음이 교차했다. 그녀는 산 속에서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았는지 모른다. 꾸미지 않아도 세상은 자신을 꾸밀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이 정한 원칙을 지켰다. 그래서 불편하고 느리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내 음식의 핵심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담는 것을 의미하죠. 여기에는 자연스럽게 평화로운 기운이 들어갑니다. 인공적인 요소가 하나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살기 급급해서 몸과 마음이 찌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정성껏 돌보면 마음도 달라집니다. 곧 치유의 과정입니다. 산속에서 배운 것도 먹는 것이 곧 치유라는 것입니다.”라다크에서 자연과 하나 되는 삶 배워그녀는 산 속에 들어가기 전 부산 금정구 두구동에서 1년, 입석마을에서 1년, 임기마을에서 1년을 보냈다. 그 후 산속에 들어갈 때는 냄비와 밥그릇 몇 개만 남겨놓고 그릇과 옷, 책도 다 나눠줬다. 학원이 잘되고 돈을 많이 벌고 언론에 관심을 받게 될수록 공허함이 밀려왔다. 마음속 깊은 곳에 평온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삶이 재미없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화려하게 보여주기만 하고 생명력이 없는 음식에 회의가 생겼다. 그 즈음 이건 아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인도 라다크(인도 북동부지역에 있는 오지)로 떠났다. 그 곳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며 차츰 평온을 찾았다. 사막생활을 하는 라다크인들을 보며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이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사이그녀가 말하다 물을 마시는 사이 잠깐 집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흰색 페인트로 칠해진 벽과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며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벽에는 약 5호~10호쯤 되는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한 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았다.“딸 작품이에요. 학교를 다니지 않고 독학했는데 지금은 제법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아마 정상적인 교육을 마쳤다면 지금의 결과는 없었을 테지요. 딸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와 음악 그리고 미술을 배웠어요.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일찍부터 배우고 익혀서 스스로 얻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그런 딸을 인정한 사건이 있다. 어느 날 영화 리스트를 가져와 엄마와 아빠가 볼 것, 자신이 볼 것이라고 보여주는데 수백 편에 걸쳐 장르, 감독, 주연, 시놉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새로 이사한 이 집은 혼자 지낼 때가 많다. 남편은 낙동강 생태지킴이로 평생 강만 쫓아다녔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지지한다. 또한 각자의 공간에서 최선을 다한다. 결과적으로 안정감을 갖게 되었다. 생명력 강한 음식 먹으면 바로 세포 형성이사 온 이후에도 그녀의 생활은 산속에서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여름에는 해가 뜨기 전 3시쯤 일어나서 요가와 산책으로 몸을 풀어주고 찾아 온 학생들과 요리공부를 하고 한 살림 강연도 하면서 지낸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9시 30분쯤 잠든다. 오랫동안 이렇게 살다보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왜 그렇게 먹어야 하는지가 명료해졌다. 각각의 음식이 가진 성질과 향, 모양, 맛을 자연 상태 그대로 먹는 것이 우리 몸에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았다. 생명력이 강한 음식들은 내 몸에서 바로 세포가 되는 걸 느꼈다. 그 결과 몸이 가벼워지면서고 행복감이 충만하고 평화로웠다. 속과 마음이 더불어 편안해 진다. 오방색을 즐기고 항상 가까이 하면 힐링“음식의 오방색을 상에 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몸도 알고 보면 빛으로 되어 있습니다. 명상을 하다 빛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뼈 속이 뜨거워집니다. 바로 원적외선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햇볕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힐링이 됩니다.”그녀는 우리 인생이 힐링 하려면 오방색을 생활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즉, 식품도 5가지 색을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 고대미는 쌀의 오방색(흑미, 녹미, 현미, 적미, 백미)을 복원한 것으로 7대3의 비율로 섞어 먹으면 좋다. 자연밥상은 농부의 밥상그녀에게 자연밥상은 무엇일까? “농부의 밥상입니다. 앞으로 농부가 잘 사는 세상이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도 옛농법을 복원해서 유기농 무농약으로 농사를 지으면 좋겠습니다.”현재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성폭행 그리고 자살 등은 어려서부터 화학첨가물이 잔뜩 들어간 식품을 부자연스럽게 먹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자녀들에게 자연식 밥상을 차려주면 폭력이 사라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옛 농법을 복원하려면 작은 소모임들이 활성화 되어야 합니다. 즉, 공동생산자 개념으로 유기농협동조합에서 구매한 식품으로 밥을 짓습니다. 재료가 좋은 것은 양념을 적게 합니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요리책에 나온 모범 레시피를 믿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음식은 저마다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공한 레시피는 음식 고유의 빛과 향, 맛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사용되는 게 맞습니다.” 건강해지기 위한 10계명건강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그녀는 특별히 건강해지는 법 10가지를 알려주겠다고 한다. 첫째, 시간에 쫓기지 말자 둘째,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충실하자 셋째, 아주 피곤하면 무조건 쉬어야 한다 넷째, 해질 때 자고 해뜰 때 일어난다. 다섯째, 불안증과 염려를 떨쳐 버린다 여섯째, 슬로우 푸드를 먹어야 한다. 즉 사랑과 정성이 가득한 음식을 먹어야 힐링이 된다. 일곱째, 외식하지 말고 가정의 엥겔지수가 올라가야 한다. 여덟째, 삶과 놀이와 일이 하나가 되면 무척 편해진다. 아홉째, 생각하는대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긍정적인 생각이 중요하다. 열 번째, 자신을 소중하게 돌보면서 살아야 한다. 최고의 자연밥상을 맛보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밥 익는 냄새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안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그녀가 웃는 얼굴로 나왔다. 다행히 밥은 타지 않았나 보다. “더 물어볼 게 없으면 이제 그만 식사하세요. 차린 것은 없지만 여기 먼 곳까지 왔는데 동영상 촬영을 하지 못하게 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차린 것이니 맛있게 드세요.”인터넷에 무분별하게 유포되는 것이 싫다며 한사코 동영상을 거절했던 그녀가 밥상을 차려주자 놀랍고 고마웠다. 사실 아침 일찍 출발한 탓에 식사를 못해서 배가 무척 고팠다. 안으로 들어가자 회의 탁자 겸 식탁에 자연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오곡밥, 콩가루 무친 쑥, 산나물, 질박한 그릇에 담아 내 온 묵은 김치, 여러 가지 채소와 두부를 넣어 보글보글 끓여낸 된장찌개까지 거기에 텃밭에서 따 온 싱싱한 상추와 머위가 식욕을 부추겼다.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오방색이 다 들어간 고대미의 맛은 특별했다. 입 안 가득 단맛, 거친맛, 신맛, 짠맛, 고소한 맛 등 다섯 가지 맛이 모두 느껴졌다. 담백한 자연식이었다.마스터들과 평생 같이 공부할 계획식사를 하면서 앞으로 계획에 대해 들어 보았다. “2010년에 설립한 살림음식연구원에서 나와 함께 음식을 공부하는 마스터들이 34명 있습니다. 이들과는 평생 같이 공부할 계획입니다. 이분들 중심으로 작년 12월에 사단법인 ‘평화가 깃든 밥상’을 만들었어요. 청소년 급식지도, 도농협력네트워크 구성, 지구환경 음식으로 돌보기, 생태적인 삶을 위한 워크숍 등 좀 더 사회적이고 공적인 활동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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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요 조태권 회장...“한 나라의 도자기와 음식 그리고 술은 운명공동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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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광주요 조태권 회장은 우리의 술과 음식 그리고 도자기에서 한국인의 정신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태권 회장은 한마디로 멋진 남자다. 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독특한 스타일만이 아니다. 일단 조 회장과 대화를 시작하면 그가 멋진 남자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988년부터 광주요를 우리의 전통 도자기 전문 회사로 발전시켜 온 조 회장은 2000년 이후 우리의 식문화를 새로 쓰기 시작한다. ‘화요’와 ‘가온’이란 브랜드로 탄생한 소주와 한정식 전문 레스토랑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무려 15년이란 긴 산통 끝에 세상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지난 5월 말 '멋진 남자‘ 조태권 회장의 집무실에서 식문화에 대한 그의 철학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직접 들어 보았다. 싸구려는 절대 최고의 반열에 오를 수 없어조 회장은 생활 속에서 우리 것을 찾기가 힘들다고 안타까워한다.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담는 그릇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패스트푸드와 국적불명의 음식들이 우리 식탁을 휩쓸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식문화를 잊고 사는 것이 더 큰 시행착오입니다.” 그러면서 조 회장은 우리의 식문화가 일본이나 외국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이유도 음식과 그릇 그리고 술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일본에 의해서 우리의 전통자기가 사라지고 전통 술이 사라지고 대신 서민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소주가 일반화 되었고 특색 없이 대량생산된 그릇들이 나오게 되자 우리의식에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는 점차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시작된 인터뷰는 뜨거운 불가마처럼 활활 타올랐다. 조 회장의 에너지는 생각했던 것 보다 강했다. 그가 품고 있는 식문화에 대한 철학을 다 듣기엔 시간이 부족할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사라져 가는 식문화를 되살릴만한 해답을 갖고 있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세계화 시킬 수 있는 우리의 문화입니다. 그중 식문화가 가장 세계화 시킬 수 있는 문화죠. 그것은 세계인의 눈높이에 맞게 창조해야 할 무한의 자산입니다.” 조 회장은 전통자기인 광주요에서 출발해 전통주 ‘화요’와 전통한정식 ‘가온’을 세계화시키기 위해 직접 나섰다. 이미 광주요를 통해 장식장에 있던 도자기를 생활 속의 도자기로 개념을 바꾸는데 성공시킨 조 회장이었다. 그가 이번엔 소주 ‘화요’를 통해 대기업들이 장악한 국내 소주 시장에서 조용한 돌풍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도수가 41도인 ‘화요’는 시판가 2만 2,000원. 영업점에서는 5만 원대에 팔린다. 조 회장은 ‘화요’ 이야기가 나오자 특유의 ‘식문화론’으로 말을 풀어나간다. “절대 ‘싸구려’는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를 수 없습니다.” 백발의 노신사의 입에서는 파격적이고 단호한 철학이 쏟아져 나왔다. “술과 음식 그리고 이들을 담는 그릇은 실과 바늘의 관계입니다. 한식이 세계화에 실패한 이유는 포장을 잘하지 못해서죠. 고급 한정식을 바라보는 사람들 대부분 옆에 앉는 여자가 예쁘면 됐지, 음식 내용이나 그릇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음식 문화라는 게 없어요. 음식 장사도 상놈이 하는 거지 양반이 하는 장사가 아니란 거죠. 돈 있는 사람은 결코 음식 문화라는 거 안 합니다. 그런데 나는 20년 동안 약 500억을 털어 넣고 ‘식(食)문화’를 세계화 시키려고 노력했어요.” 이렇게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했지만 그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시장이 형성되려면 시간과 돈이 더 필요한데 자신의 능력으로는 한계에 온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는 정부나 대기업이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세계에서 자동차 시장은 1320조원, IT 산업 시장은 2700조원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식품 산업 시장은 4800조원이며, 이중 외식 산업이 2300조원입니다. 이런 큰 음식 시장에서 우리 몫이 없어요. 우리 것이라고 아직 보여준 게 없었으니까요.” 그에게 식문화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음식이란 한번 각인되면 계속 갑니다. 음식의 생명은 포장이지요. 그릇과 테이블과 세팅과 꽃과 거기에 모든 소품들과 그 분위기와 거기 온 손님, 음악, 술, 모든 게 음식을 위해 포장하고 있는 거죠. 이런 음식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식문화는 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을 하루아침에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공하면 그건 영원히 보장되는 사업입니다.” 세계시장을 보고 시작한 우리의 식문화 만들기 조 회장은 광주요(窯: 도자기) 창업자인 조소수 선생의 아들이다. 그는 경기고를 나와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미국 미주리산업대 공업경영학과를 다닌 후 대우에서 해외근무를 했다. 거기서 독립해 중동에서 무기·중장비 장사를 했고, 그의 말대로라면 엄청난 성공을 했다. 그러던 중 부친이 타계하자 1988년 광주요를 이어받았다. “저는 급하고 돌진하는 스타일이었지요. 중동에서 무기 장사를 하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도 발생하니까요. 그런데 도자기는 제게 기다리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인내를 키워주는 겁니다. 한 번 불가마에 들어가면 3개월이란 시간이 걸립니다. 원하는 것이 안 나오면 또다시 해야 합니다. 3개월에서 또 3개월. 도자기 사업을 안 했다면 나는 인내심도 없고,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지 않았을 겁니다.”그는 한국에 돌아와 부친의 사업을 이어 받았다. 그리고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문화였다. 처음엔 도자기를 어떻게 하면 생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만들까 고민했는데 곧 방향을 바꾸었다. 이미 서민들을 위한 그릇은 도자기가 아니라 공장에서 막 찍어 낸 유리와 사기 그리고 플라스틱 그릇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조 회장은 상류층을 겨냥해 광주요를 고급화 시켰다. 장식용 도자기가 아닌 생활 도자기로 작품과 같은 특별한 생활자기들을 선보였다. 그의 마케팅 전략은 성공했다. 그렇게 광주요의 성공으로 그는 식문화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가 다음 단계로 시작한 것은 ‘가온’이란 전통 한정식 레스토랑이었다. “처음에 도자기에 음식을 담고 음식재료를 고급화하니까, ‘한식은 이렇게 비싸면 안 돼’ 라는 말들을 많이 들었지요. 그 말씀을 하시는 많은 사람들은 뒤에서 발렌타인 30년산을 마시고, 10만~20만원짜리 와인을 먹죠. 우리 한식은 10만원만 돼도 비싸다고 합니다. 우리 것을 낮게 보기 때문에 우리 것은 비싸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가온’은 생각보다 힘에 부쳤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 어려운 시간을 많이 보냈지요. 아내가 ‘그만 접고 해외에 나가서 살자’고 했습니다. 사실은 7년 전쯤 그만둘까 했지요. 그런데 식문화라면 도자기와 음식, 그리고 술이 있어야 완성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술도 만들기 전에 중단하면 지금까지 해온 것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술까지 만들어보고 그만두겠다’고 마음먹고, ‘화요(火堯)’라는 술을 만든 겁니다. 술을 만들고 보니 이제는 갈 데까지 너무 가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내 모든 걸 넣어야 하겠더라고요. 집사람에게는 ‘어느 누가 할 수 없는 걸 내가 만들어 놓으면 내가 성공하든 안 하든 누군가가 이어간다. 그것만으로도 노블리스오블리제를 실천한 셈이 되니까요. 사람이 스스로 자기 최면에 걸리는 것처럼, 이제 이렇게 생각이 굳어져 버렸어요.”광주요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들 그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확고하다. 국내만을 보고 시작한 게 아니란 뜻이다. 그는 세계의 모든 나라에 우리의 고급 식문화를 보급하고 그들의 식탁에 우리의 음식과 술 그리고 그것들을 담은 그릇을 올려놓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5000만명을 보면 안됩니다. 우리끼리만 얘기하면 언젠가 고립되고 맙니다. 앞으로 전세계 중산층은 20억 명쯤 늘어나는데, 이들을 상대로 시장을 개척해야지요. 일례로 제가 홍계탕(홍삼과 오골계를 넣고 끓인 육수에 쌀을 넣고 쑨 죽)이란 걸 만들었어요. 제일 비싼 게 30만원입니다. 얼마 전 미국판 시사주간지 타임에 한국에 가서 즐길만한 요리로 소개된 것이지요. 이를 누구나 먹자는 게 아닙니다. 최고의 음식을 먹는 사람이 왔을 때 그 사람에게 대접하자는 거죠. 국내 대기업 초청으로 두바이의 왕자들이 왔을 때 우리 식당에서 저녁 만찬이 있었지요. 그때 홍계탕을 내놓았습니다. 다음날 이 왕자들이 ‘또 먹고 싶다’며 호텔 숙소로 다섯 그릇을 주문해 갔습니다. 슈퍼스타가 있어야 주연이 만들어지고, 조연도 만들어 집니다. 또 그 조연 속에서 주연이 나오는 거죠. 식문화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경쟁 속에서 우리 전체 식문화가 발전된다는 거죠.” 조 회장은 모든 음식이 세계화 되려면 우리의 눈높이가 아닌 세계인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고급 호텔처럼 세련되게 꾸며진 ‘가온’의 공간 안에는 민화 벽지와 ‘시가’ 장식품 등 국내외 문화가 공존한다. 게다가 음식은 코스식으로 나온다. “전통의 복원은 옛 것을 그대로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에 맞게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가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려면, 어떤 문화와도 잘 공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세계적인 명품을 만들어내려면, 그렇게 최고급 문화를 공략해야 하는 것이죠” 식문화 사업은 정부와 대기업이 적극 동참해야 그의 고집스러운 식문화 철학이 세계에서도 통한 것일까? 증류식 소주 ‘화요’가 2008 몽드 셀렉션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조 회장은 “2년간 묵혀뒀던 화요를 출품해 놓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돼 기쁘다”며 “출시된 지 3년 됐지만 술은 계속 익어가고 있으니까 매년 새롭게 내놓을수록 품질은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8 몽드 셀렉션은 4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주류 심사 이벤트로 매년 1400여가지 품목에 대해 까다로운 심사과정을 거친다. 비엔나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을 준비 중인 조 회장은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해외 거래처에서도 주문이 이어지고 있다”며 “특히 프랑스 파리 등 유럽 지역의 반응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화요’는 지난해 영국 런던에서 열린 2007 IWSC 국제주류 박람회(International Wine &Spirit Competition)에서 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조 회장은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문화력, 조직력, 자본력이 있어야 한다”며 “가온을 세계시장에서 성공시키기 위해서 정부의 지원과 대기업의 관심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지난 20년 동안 노력 해 온 결과를 국민과 함께 나눌 것이라며 무형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고 밝혔다. “고려청자와 이조백자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의 문화입니다. 그런데 일제치하에서 완전히 말살당한 것이죠. 대한민국에서 어느 누구도 백자와 청자를 재현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도자기 만이 아닙니다. 일제 36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중 우리의 식문화도 바꿔놓았죠.” 조태권 회장은 50년 후 세계시장을 내다보면서 지금의 식문화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그의 희망대로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길은 하루속히 우리의 우수한 식문화를 육성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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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기누설...“명상과 기수련으로 심신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어요”
천기누설...“명상과 기수련으로 심신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어요”
[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서울 강남에 에너지가 충만한 도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엔 믿지 않았다. 적어도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도인은 도시가 아닌 지리산이나 계룡산 등에서 도를 닦고 있어야 했다. 따라서 강남 한복판 오피스텔에 사는 도인이라면 틀림없이 도인 흉내를 내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간 수많은 국내외 명사들을 치료하고 효과를 봤다는 얘기가 나와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렇게 반신반의 하면서 도인을 찾아갔다.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자 도인은 보이차를 내주면서 말문을 열었다. 도인이 사는 곳이 궁금했기에 보이차를 받으면서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차가 있는 거실에는 물을 끓이는 전기포트 외에 전자제품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도자기에 관심이 많은 듯 색이 예쁜 다기와 도자기 몇 점이 반듯하게 놓여진 모습이 시선을 편하게 해 주었다. 도인은 명함을 건네며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명함에는 고산 대선사라 적혀 있었다. 직함은 대한민국문화예술총연합회 체육분과위원장으로 되어 있었다. 어떤 일을 하시느냐고 묻자 돌아온 답은 간단명료했다. “기와 명상으로 사람들이 건강한 심신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고산 선생의 본명은 이태렬이다. 그는 자신을 선사라 불러주면 좋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경상도 마산 무악산에서 도를 닦고 내려와 수년간 누구나 알만한 정치인과 국악인, 연예인들의 주치의를 했었다고 한다. 왜 명상과 기치료가 필요하냐고 묻자 이번엔 한 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국가 중 최고입니다. 현대인의 질병 중 우울증은 갈수록 증가하고 있습니다. 불면이나 고독, 우울증이 개선되지 않고 심화되면 정신은 황폐화됩니다. 육체 또한 건강을 잃기 쉽습니다. 마음의 병은 명상을 통해 빠르고 효과적으로 개선할 수 있습니다. 기치료를 통해서는 육체의 건강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명상과 기치료를 병행하면 충분히 우울증이나 외로움 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선사는 잠시 얘기를 멈추더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의 강론은 이어졌다. “기와 명상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어렸을 때입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어린아이 였을때부터 악몽에 시달리고 가위눌림이 심해 잠을 자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소위 영화에서 나오는 수련 비슷한 것을 혼자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20대초반까지 계속해서 수련에 몰두 했습니다. 마산의 무악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20대 중반이 되었을 때 하숙집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매일아침 시간을 정해놓고 명상과 복식호흡을 꾸준히 했고 식이요법과 운동을 병행했습니다.“ 선사는 어린시절 자신이 겪었던 고통의 시간과 그것을 극복하기위해 자연스럽게 기수련과 명상법을 익히게 된 연유를 설명했다. 기와 명상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악몽도 사라졌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기는 무엇이고 올바른 명상법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선사가 풀어놓은 자신의 수련법과 지식은 다음과 같다. “기(氣)수련은 仙수련이며, 元心수련이고 仙-요가(힐링요가)를 말합니다. 仙은 지금으로부터 6000년전 배달민족의 뿌리인 고조선인 3000여명이 수행하던 신선수련법으로 풍류도. 국선도. 화랑도등으로 전해져 온 전통 민족 신선수련법입니다. 仙의 시조는 원시천존으로 중국 고서에 보면 최고신입니다. 仙의 최고의 경지는 살아서 육신이 사라지는 100일 승천, 다음이 죽어서 시체가 사라지는 시해선입니다. 仙道는 양신이나 출신. 즉문즉답. 자발공. 천신과의 대화 등의 능력이 발휘 되는 것이 아니고 무념무삼의 삼매를 체득하게 됩니다. 선도 초기에는 한두 번쯤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으나 84000기공과 백회를 열어 우주의 마음자리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원기를 우주(하늘. 천존)의 화현체 '진리의 상'을 통하여 축기. 운기하는 仙法입니다. 仙法은 하늘(대우주. 자연)의 기운을, 마음을 집중시켜 주로 손끝과 장심으로 축기. 운기 시켜 부족한 기는 보충시키고 막힌 기는 뚫으며 탁한 기는 청정시킵니다. 그리하여. 면역력이 강화되고 자연성(자연 치유력)이 활성화 되어, 어떠한 질병에도 잘 걸리지 않는 건강 체질로 바꿔. 우울증, 치매. 중풍. 암. 각종 성인병으로부터 해방되며, 활력과 지혜와 총명이 넘치는 훌륭한 인격자로 변모해 가는 수행법입니다. 기수련의 차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천기통문으로 대우주원기축기로 기혈을 활성화 시킵니다. 두 번째는 내면교감으로 운기에 해당하며 머리가 총명해지고 집중력이 강화 됩니다. 세 번째는 제사정화로 사기를 배출하고 오장육부를 활성화 시킵니다. 네 번째는 장심강화로 약손능력배양을 하고 어깨근육을 강화시켜 줍니다. 다섯 번째는 단전강화로 생명원기강화를 하고 변비와 비만을 해결해 줍니다. 여섯 번 째는 전신개혈로 대주천 호흡이고 면역력을 강화시킵니다. 일곱 번째는 원기유통으로 생명력을 극대화시키고 건강과 피로회복에 좋습니다. 여덟 번째는 지기상통으로 지기보충이고 음과 양의 기운을 조화롭게 유지합니다. 아홉 번째는 천안개명으로 마음을 밝혀주고 건전한 정신을 함양시켜 줍니다. 열 번째는 생식력강화로 하초를 강하게 하고 출산력을 증가시킵니다. 열 한번째는 전신운기로 입체적기운용을 하여 치유능력을 갖게 합니다. 기(氣)란 무엇일까요? 기는 고대 동양에서는 우주 만물을 이루는 근본을 氣(진동․파장으로서 보고. 듣고, 냄새의 모든 것)라고 보았습니다. 기는 음(-)기와 양(+)기로 되어 있으며, 이 두 종류의 기가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서 만물의 근간을 이루는 오행인 木(목)․ 火(화)․ 土(토)․ 金(금)․ 水(수)가 생기고 그것들이 조화되어 만물이 생겨나고 변화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몸에는 기가 흐르는 12경락과 기경 팔 맥이 있습니다. 경락은 오장 육부 와 관련을 가지며, 기혈과 영양 물질의 운행 통로가 됩니다. 이 경락의 기능을 보조하는 기경 팔 맥은 12경락의 균형을 조절하며 각 경락이 지닌 특수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통제하여 생명을 유지 하게 합니다, 경락에는 외부의 기를 흡수하고 체내의 탁한 기운인 사기를 내 보내는 등 기를 상호 교류 하는 곳이 있는데 이를 血(혈)이라합니다. 인체에는 360곳의 혈이 있으며 우리 피부에는 84000기공이 있는데 이를 통하여 기가 방출되고 흡수되는 기의 호흡이 이뤄집니다. 기의 호흡이 파동의 형태를 취하므로 전기가 흐르는 주위에 전자파가 발생하듯 이 기가 흐르는 몸 주위에도 일종의 기의 파동인 오라가 발생합니다. 전기가 세게 흐르면 전파도 강해지듯이 우리가 건강하고 기가 넘치면 오오라가 강해져 얼굴빛이 밝아집니다. 이것을 보고 안색이 좋고 얼굴빛이 훤하다고 합니다. 마음이 즐겁고 사랑스러우면 생기를, 마음이 악하고 증오스러우면 살기를 내 품게 됩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옛말이 근거 없는 말이 아닙니다. 항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사에 담담한 마음을 가지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감사와 겸손, 근면과 성실한 자세로 임할 때 항상 생기 넘치는 건강 인이 될 것입니다. 21C는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 한만큼 환경은 파괴되고 오염되어 무한한 우주의 기운(에너지)를 활용하는 분들이 건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의 종류는 천기, 지기, 영기로 나눈다 氣의 종류에는 天氣(천기). 地氣(지기). 靈氣(영기)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하늘이라는 창공을 비롯하여 해와 달. 바다. 땅. 산. 강. 나무 등은 모두 지기이며 환경오염으로 하늘 과 땅의 自然(자연)의 기가 오염 되었으며 靈(영)의 기운은 고급에서 저급까지 여러 계층의 기운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성인들의 기운. 영웅들의 기운. 각 분야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고급기운에서 각종질병을 일으키는 기운. 살인 등 흉악범의 기운. 자살을 유도하는 기운. 시기. 질투. 탐욕 등을 일으키는 삿된 기운의 저급기운이 있습니다. 정신계 수련에 임하시는 분은 피라밋 원리 또는 히랏야 원리를 이용하거나 深山幽谷(심산유곡) 명당을 찾아 기수련을 함으로서 수련효과를 높이는 것 입니다. 天氣(천기)는 태어 날 때 받는 기운으로(갓난아이는 천기를 숨골(전두엽)로 받음) 우주의 마음자리에서 발현되는 元心(원심)의 기로 우주에서 가장 맑고 밝은 기운입니다. 天氣는 우주의 마음자리에서 발현되는 氣로써 이를 받기 위해서는 TV를 시청하는데 안테나가 필요하듯 우주의 안테나가 필요합니다. 大宇宙(대우주)의 몸체(肉身.육신)인 地水火風(지수화풍) 과 대우주의 마음 心이 각인된 眞理(진리)의 象(상)이 바로 대우주의 마음자리에서 발현되는 천기를 수신 할 수 있는 우주의 안테나입니다. 이러한 천기를 받을 수 있는 여건 속에서 수행할 때 깨달음과 건강이 자연스레 옵니다. 그렇다면 천기를 통해 어떻게 기치유를 할 수 있을까요? 먼저 기치유란 경락마사지 교정과는 차이가 있으며 天氣(천기). 地氣(지기). 靈氣 (영기)를 활용하여 환자의 탁한 기운을 청정하고 부족한 기운을 보충시켜 환자의 회복력 증진 과 치유에 도움을 주는 태고 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간의술로의 약손 요법이며 도인들이 체득한 手氣(수기)입니다. 대부분 영기에 의한 기치유를 하고 있으나 고급영에서 저급영까지 다양한 부류가 있으며 저급영에 의한 기치유는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킬 수가 있으므로 수행의 과정 및 성격 습관 품격 등을 잘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치유 및 기수련은 약해진 선천의 기 생명의 원기를 고도의 정신수련을 통하여 얻어진 생명의 원기를 전수하여 환자의 원기를 강화시켜주고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여 생명력증진. 면역력증진. 소화력증진을 도모하여 환자의 탁한 기운을 몰아내고 긍정적인 사고와 감사하는 마음을 이끌어 내어 회복기간을 단축시키고 치유력을 극대화 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현대는 고층빌딩. 아스팔트 길. 시멘트 바닥. 매연과 부유먼지. 오존층 파괴 등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의 삶으로 생체리듬이 약해져 불면. 불안. 우울증. 공황장애. 정신분열증 등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탁한 기운. 약한 기운으로 발병됨으로 강한 생명의 원기인 기치유를 받으면 서서히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오염되고 산천이 오염된 현대에 사는 분들은 특히 만성피로에 지친 현대인에게 면역력이 저하된 환자분에게 대체의술로서의 기치유는 탁월한 효과를 나타내며 각종성인병. 항암치료 후유증 해소와 간질. 신경성 등 이름 모를 病魔(병마)에 큰 효과가 나타납니다. 생명체는 대우주의 마음자리에서 발현되는 생명의 元氣(원기)를 받고 살다가 원기가 소멸되면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인간도 先天(선천)의 氣(기)인 생명의 원기를 받고 태어나서 後天(후천)의 氣공기. 수기. 곡기등과 조화를 이루면서 활기찬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양질의 섭생을 통하여 장수와 튼튼한 몸매를 가꾸었습니다. 그러나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근심. 걱정. 스트레스는 증가되어 원기소모 또한 증가하여 키와 체중은 증가하였으나 인내심. 끈기력. 체력은 저하되고 있습니다. 또한 수명은 많이 연장되었으나 삶의 질은 그렇지 못할 뿐 아니라 이름 모를 각종 질병과 암 비만 관절염 성인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자살율 OECD국가 중 1위의 불명예를 갖게 되었습니다. 피라미드 원리. 히란야 원리. 자연물 등을 이용하여 대우주의 기운을 모으고 치환하여 축기 운기를 통한 기 치유는 자신을 위한 것으로 중환자에게 전해줄 때 다량의 氣소모로 회복이 늦거나 탈진되면 오히려 내가 병에 걸릴 수 있으므로 신중을 기해야 하며, 하루에 중환자 10명 이상 기 치유를 해도 이상이 없는 분들은 천기를 활용하는 분들로 부작용이 없고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는 맑고 밝아짐을 느낍니다. 고도의 수련을 통한 천기의 기 치유는 생명력을 극대화시켜 불치 난치의 환자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활력 넘치는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허리가 삐끗하여 오는 통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분. 가벼운 질병 등은 즉석에서 통증을 死(사)하여 주며, 성인병을 비롯한 난치병 등은 기혈순환이 원활치 못해 하단전 (아랫배)이 냉해지면서 면역력이 떨어져 생기는 병들로 생명력인 元氣(원기)를 받으면 기혈순환이 원활해지면서 배와 손발이 따뜻해지고 면역력이 강해져 성인병 및 난치병에 탁월한 효과는 물론 항암치료 중인 암환자에게도 탁한 기운 등을 신속히 제거하여 치료 효과를 극대화 시켜주는 21c 최고의 의통입니다. 반성하는 시간부터 가져라 다음은 명상과 명상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악한 마음을 비우고 싶다면 마음에 어떤 걸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타인을 아프게 한 일이 있다면 반성을 합니다. 혹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반응하는 똑같은 부정적인 나의 마음을 반성합니다 자기반성 다음에는 생활인으로써 스스로의 방향을 설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가다듬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문제를 오늘까지 끌고 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이 순간 새롭게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모든 행동을 설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미지를 객관적으로 살펴 남에게 부정적인 사람으로 기피 인물은 아니었는가, 항상 두려움으로 자신감 없는 행동으로 일관하지 않았는가. 조금이라도 그런 점이 있다면 긍정적인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당장 이 순간부터 스스로를 그런 모습으로 바꾸어 갑니다. 이렇게 일체의 부정적인 것에 대한 반성과 긍정적인 미래에 대한 방향이 설정된 다음에는 마음을 고요히 가라 안칩니다.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보면 쉼 없이 생각이 떠오름을 압니다. 생각을 끊으려 해도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있습니다. 이런 잡념이 떠오르면 애써 떨쳐 버리려 말고 그 잡념을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아 그 원인을 분석하고 윤리와 도덕의 잣대에 맞추어 하나씩 반성하고 올바른 것으로 설정하며 정리해갑니다. 명상하면 분별력이 생기고 원기가 회복된다 명상을 하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참선 즉 명상을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몸과 정신의 변화가 옵니다. 자신의 언행과 생각을 객관적으로 비판하는 분별심을 통한, 분별을 넘는 자기성찰을 통해 수정처럼 맑고 옥같이 고운 본래의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며 행으로 옮기려 애쓰는 가운데 흐트러진 마음이 하나씩 갈고 다듬어져 차츰 맑고 밝아져 착한 심성을 갖게 되며 이때 생명의 원기가 가득 채워져 중단전이 열리고 상단전이 밝아져 彼岸(피안)의 경지 三昧境(삼매경)에 들게 됩니다. 삼매경에 진입하면 기혈순환이 활성화되어 손발이 따뜻해지고 중단전이 열려 가슴이 확 트이며 척추는 곧 바로 펴지며 상단전이 밝아져 머리가 맑아지며 몸이 가벼워지고 기공이 열려 피부호흡이 이루어져 몸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며 온몸이 모닥불을 피운 것처럼 기화됩니다. 입안은 상쾌하고 옥침이 나와 위와 장기를 튼튼하게 합니다. 피로가 가시고 기력이 되 살아나며 총명한 지혜, 깨달음이 옵니다. 깨달은 자는 만물의 靈長(영장)이요 主人(주인)으로써 대자유인이 되어 어떤 것에도 치우침이 없는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로 生老死(생노사)의 攝理(섭리)와 忠孝禮(충효예)의 理致(이치)를 터득하여 더불어 地上仙境(지상선경)의 主役(주역)으로써 役割(역할)을 묵묵히 펼쳐갑니다. 삼매경에 몰입하면 마음의 작용이 완전히 멈춰 대우주와 하나가 된 無念無想(무념무상)의 경지에서 나도 없고 너도 없는 無我(무아)의 경지에 듭니다.(하늘(대우주)과 하나 되면 醫通(의통)은 자연스레 이루어집니다) 복식호흡을 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지혜가 충만된다 끝으로 호흡(복식. 단전) 법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으~앵하는 호(날숨)로 태어나서 운명 시 깊은 숨을 들이쉬는 흡(들숨)으로써 한 생애를 마무리합니다. 갓난아이는 숨골이라는 백회와 전두엽으로 天氣(천기)를 받아 숨 쉬는 대주천 호흡에서 단전호흡 복식호흡 흉식 호흡 어깨호흡으로 이어지는 삶이 전개됩니다. 건강을 잃은 대부분의 사람은 흉식 호흡으로, 중환자는 어깨호흡을 합니다. 정신수련에 임하는 모든 분들은 호흡의 중요성을 깨닫고 복식호흡이 늘 떠나지 않도록 합니다. 나아가 의식을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에 두면서 단전호흡을 합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 하단전에 精(정)이 쌓여 따뜻해지며 중단전에 氣(기)가 충만 되고 상단전에는 精神(정신)이라는 빛이 밝아집니다. 하단전 호흡법은 의식을 하단전(배꼽 및 2치 반에서 등 쪽 2/3지점)에 두면서 호흡을 가늘고 길게 하면 하단전부위에서 열감이 느껴지며 이 열감이 회음을 지나 척추를 타고 백회. 얼굴. 가슴을 지나 하단전에 이르는 소주천 행공이 이루어집니다. 소주천 행공은 기감이 예민한 사람은 기감을 느끼게 되나 둔감한 사람은 못느끼기도 합니다. 하단전 호흡 시는 허리를 너무 곧게 펴는 것 보다 깊은 호흡이 잘 되도록 합니다. 소주천 행공이 잘 되면 하단전에 의식을 두어도 상단전이 밝아지며 입안에는 상쾌한 침 옥침이 고이며 胃腸(위장)과 장기들이 튼튼해집니다. 대주천 행공은 백회와 전두엽을 통해 곧 바로 天氣(천기)가 하단전에 모여지는 것으로 이때는 살모사가 머리를 쳐드는 것과 같이 허리가 곧게 펴지며 척추에 힘이 꽉 차이며 배는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84000기공이 활짝 열려 기공호흡. 피부호흡이 왕성히 이루어져 몸에는 싱그러운 냄새가 납니다. 三昧(삼매)란 잠자는 것과 매우 비슷하나 고개나 허리가 처지지 않고 곧 바른 상태를 유지하면서 몸은 가벼워지고 머리는 맑아지면서 밝은 지혜가 싹 틉니다. 호흡(복식. 단전) 호흡법은 코로 숨을 들이 마실 때 아랫배(단전)가 불러지도록 하고 숨을 내 쉴 때는 아랫배가 들어가도록 하는 호흡법으로 평상시 호흡보다 조금 길게 연속적으로 반복하여 차츰 시간을 길게 하는 것으로 무리하게 지식호흡을 하지 안 토록 하는 호흡법입니다. 하지만 몸이 안 좋을 경우는 숨을 들이 마실 때 아랫배부터 가슴 어깨까지 숨을 꽉 채우고 숨을 내 쉴 때는 아랫배부터 천천히 꺼지도록 합니다. 호흡(복식. 단전) 효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앉아서 또는 서서 일을 합니다. 반가부좌 등의 자세로 깊은 호흡을 하게 되면 하체로 가는 피는 극소량이 되고 많은 피가 복부에 모이게 됩니다. 이때 깊은 호흡으로 즉 강한 펌프질을 하게 되며 복부에 모인 피가 회음 척추를 통해 뇌까지 많은 양이 전해집니다. 뇌에는 많은 모세혈관이 있습니다. 많은 피의 공급으로 막혔던 뇌혈관들이 원활이 작동하게 됩니다. 그 느낌은 처음에는 머리가 간지럽고. 까실까실한 느낌에서 이슬비가 내리는 것 같습니다. 깊어지면 벌레가 지나가는 느낌. 박이 터지는 느낌. 소나기가 지나가는 느낌. 더욱 깊어지면 내 몸이 기화되는 느낌. 모닥불에 타는 느낌이 들며. 나중에는 상 서러운 기운. 빛나는 후광이 생기며 몸이 가볍고 항상 원기가 충만한 건강한 삶이 주워집니다. 막걸리 한 사발을 빨리 마실 수는 있지만 티스푼으로 천천히 마시면 취기가 올라와 다 마시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호흡을 가늘고 길게 호흡하면 고농도의 산소를 흡수 할 수 있으며 길게 뱉는 호흡을 통해 피부의 84000기공이 열려 피부호흡이 일어나 피부가 고와지며 각종 피부병이 완치됩니다. 호흡이 고요해 지면 삼매경에 들며 입안에는 상큼한 침 옥침이 고여지고 이 옥침이 위를 튼튼히 하고 맑고 밝은 기운으로 지혜의 문이 열리고 무병장수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수련에는 바른 자세가 기본이다 호흡과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자세 역시 중요합니다. 바른 자세에서 바른 행이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기혈 흐름에 장애를 일으키고 장기의 기능이 둔화 되어 몸에 이상이 옵니다. 바른 자세는 바른 자세와 편한 자세로 나눕니다. “제가 어린시절 수련할 때는 특별한 스승이나 참고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책 구하기를 그만두고 스스로 독학을 하며 체득했습니다. 식이요법 역시 매일 아침마다 쌀이나 콩을 씹어서 먹었고 나중에는 현미를 먹었습니다. 그렇게 생식하며 수개월을 보내니 기운이 좋아지고 뻐마디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해보니 사람마다 파장이 다르고 기의 운행이 다르기 때문에 맞춤식 수련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가 약한 사람이 있고 기가 강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에 맞는 명상과 기치료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선사는 계속해서 기와 명상, 식이요법 등에 대해 설명했고 이어서 서양에서도 대체의학이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강조했다. “서양 국가들에서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의학적 치료의 일부로 대체의학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1997년, 미국인들은 대체의학 요법사에게 6억 2,900만 회 이상의 방문을 했고, 이는 1990년 이래로 47% 증가한 수치입니다. 이 수치는 같은 해에 모든 1차 치료의사를 방문한 3억 8,600만 회를 상당히 초과합니다. 2007년에는, 18세 이상 미국인의 38%가 어떤 형태의 대체의학을 이용했습니다. 사람들이 대체의학 요법을 찾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태는 근골격계 문제(예: 만성 요통, 경부통 또는 관절통), 불안감, 높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 코감기 또는 기침감기,두통,수면 문제, 아토피 등 피부염, 그밖에 암 등 목숨을 위협하는 질병에 직면한 많은 사람들은 특히 말기에 전통적 치료가 거의 희망을 제공하지 못할 때 대체요법을 찾고 있습니다.” 명상이나 기수련은 집보다 산에서 하는게 효과가 좋다 선사는 명상이나 기수련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시간이 허락한다면 집보다는 산이나 조용한 암자에서 하기를 권한다. “외국인들도 한국의 기치료나 명상법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한국의 산이나 암자를 찾아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수련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활상의 이유로 그러지 못하는 실정이 안타깝습니다. 저는 좀 더 멀리 보고 자신의 건강이나 가족의 건강을 위한다면 적어도 한두달은 심산유곡에서 기수련이나 명상을 하길 권합니다. 물론 시간이나 환경이 허락해야겠지요.” 산에서 하게되면 무엇보다 우주의 파장을 그대로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의 안정을 가져와 효과가 크다. 여기에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정확하게 배우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치료를 통해 앞서 말한 여러 가지 난치병을 치료하고 정신병도 낫게 할 수있다. 선사는 기치료란 막혀 있는 기혈을 뚫어주고 기순환을 원활하게 해서 나쁜 독을 밖으로 배출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모세혈관이 살아나고 해독이 잘 되기 때문에 면역력이 강화되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다. 또한 체온이 상승하면서 건강해진다. 선사에게 그동안 수행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냐고 물어보았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생사를 넘나들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기의 운행 원리를 깨달았고 내 병도 내가 알아서 고칠 수 있어서 만족합니다.”선사는 수행자는 스스로 자기의 병을 고칠 수 있어야 하고 결국 수행을 완성하면 그렇게 된다고 말했다. 인성교육과 정신교육 병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선사에게 답을 구했다. “인성교육과 정신교육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사람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행복하려면 무엇보다 감각이 살아있어야 하지요. 만약 감각이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면 즐거움을 맛볼수 없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느끼는 것이고 죽으면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식 후 흰 죽을 먹으면 쌀의 맛과 향이 그대로 내 몸에 전달되는 것이죠. 혼자서 수행하는 것은 소를 길들이는 것과 같이 힘들고 고통 스럽지만 결과는 아주 좋습니다. 자기 절제를 통해 단식에 성공하고 모든 감각 기관이 다시 살아나면 그전에 느끼지 못한 사소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행복은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물질과 눈앞의 즐거움만 쫒다보면 점점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을 알게 되면 이미 늦는 것입니다. 대부분 공황장애나 우울증 등이 심해져서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감각이 살아나고 작은 즐거움을 깨닫게 되면 뇌세포가 건강해지면서 삶의 의지가 커집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되고 몸과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더욱 자신감을 되찾게 됩니다. 선사는 끝으로 “자신이 30년 넘게 수행해 온 결과물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며 “앞으로 국제 힐링센터를 중국과 한국에 세울 계획”이라는 포부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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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 자연의 원형을 담는 작가 김동석
화폭에 자연의 원형을 담는 작가 김동석
평론가 고충환 씨는 김동석의 회화를 이렇게 평했다. “그의 그림은 문학적이고 서사적이다. 그러면서도 생리적으로 소설보다는 시에 가깝다. 말을 걸어오는 방식이 풀어서 설명하기보다는 함축적이고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문법을 선호하는 편이다. 이런 말 걸기 방식은 그림에서도 나타나고 주제에도 반영된다. 이를테면 어머니의 사계(1996)외 연작, 나에게 길을 묻다(2007-2008), 그리고 and 그리다(2009-2010) 등이다.” 지금부터 대지를 화폭에 옮겨 놓는 작업을 통해 존재의 원형을 표현하고 있는 김동석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글·최치선 사진·정대일 자료사진·김동석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림을 하게 된 동기를 묻자 김동석 작가는 큰 고민없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예상 밖의 답에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을 오기로 그리기 시작했다는 말씀이냐는 질문에 웃으면서 맞다고 한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한 눈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어느 날 뒤통수를 가격당하는 충격을 받았어요.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내가 받은 상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남들 다 타는 1년 개근상이나 선행상도 타지 못했더군요. 그래서 졸업하기 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동안 반드시 상을 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 작가는 그로부터 얼마 후 학교에서 도내 미술대회에 나갈 학생을 뽑는 다는 사실을 알았다. 평소 그리기를 좋아하던 작가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자신을 내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미술부도 아닌 학생이 학교 대표로 나가겠다는 말에 선생님은 황당해 하면서 이미 나갈 학생들이 정해졌으니 어렵겠다는 말을 했다. “그때는 꼭 나가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고 싶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졸라도 선생님은 허락을 하지 않았다. 당시 크게 낙담을 한 그는 대회에 나간 학생들이 얼마나 잘 그리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마침 대회가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열렸는데 소방차들이 물 쏘는 장면을 그리는 것이 주제였다. 그는 그림 그리는 아이들을 하나 둘 살펴보기 시작했다. 특히, 추천받은 아이들을 더욱 유심히 봤는데 누구도 자신보다 잘 그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김 작가는 그 날 상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었다. 바로 자신감이었다. 중학교에 진학 한 후 김 작가는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운중지월(雲中之月)이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 받은 상은 그림이 아니라 노래였어요. <누가 누가 잘하나>에 출연해서 1등상을 받았거든요.” 김 작가의 끼는 그림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예술은 통한다 했던가. 그는 노래를 통해 먼저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미술부에 들어간 김 작가는 첫 실기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그 때의 기분은 정말 좋았다. “미술로 인정받은 첫 상이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후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나가 입선도 하면서 그림에 대해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어요.” 육사의 꿈을 접고 화가를 준비하다 김동석 작가의 꿈은 처음부터 화가가 되는 것이었을까?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렸고 대회에 나가서 여러차례 상도 탈 정도면 화가를 꿈꾸었을 것 같았다. “아닙니다. 제 꿈은 처음부터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은 오기 때문에 시작했는데 적성에 맞았던 것일뿐 제가 동경했던 곳은 육사였어요.” 세 번째로 의외의 답이 나왔다. 갑자기 그의 머릿 속에 든 생각들이 궁금해졌다.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문과가 아닌 이과를 선택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어요. 진학상담을 받았지만 성적 때문에 육사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의 상실감은 엄청 컸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좌절감 같은 것이 밀려왔으니까요.” 김 작가는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당시 목표하던 꿈이 사라져 버리자 그는 정신적으로 큰 위기에 처했고 방황을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다 문득 새로운 꿈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잘하는 일 바로 그림 그리는 것이었다. 미대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방학 때마다 홍대 근처에 찾아와서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떨어졌어요. 홍대에서 살아도 붙기 어려운데 방학 때만 올라와 배우니 한계가 있었던 것이죠.” 그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계예술대에 진학한다. 하지만 등록금을 주지 않자 하는 수 없이 입대를 하게 된다. 제대 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집에서는 제가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했어요. 그래서 등록금을 주지 않으면 스스로 관두겠지 했던가봐요.” 자퇴 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지도교수를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고 선처를 구했다. 다행히 휴학처리가 되었고 그는 1년동안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입시를 준비했다. 국민대 의상디자인과에 들어갔으나 맞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우여곡절 끝에 개최한 첫 전시회 용기를 얻다 “첫 개인전은 96년에 열었습니다. [어머니의 사계]라는 주제로 전시를 했어요.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린 것이었습니다.” 초기 김 작가의 작품은 어머니를 모티브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어머니의 사랑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의 생명을 잉태하는 대지 역시 어머니와 같았다. “첫 번째 전시도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전시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화실 보증금을 담보로 제가 대학 때부터 거래하던 은행에 찾아갔어요. 은행지점장을 만나서 사정을 얘기하고 천만원 대출을 받았습니다.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인사동과 순천에서 순회전시를 열었는데 순천전시는 6학년 때 선생님께 인정받기 위한 의도가 컸어요.” 그는 첫 전시기간 중 작품 한 점을 팔았다. 그것도 전혀 모르는 관람객이 자신의 작품을 사겠다고 했을 때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실기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은 이후 그림을 통해 인정받은 두 번째 사건이었다. “100만원에 작품이 팔렸는데 정말 기분이 이상하더군요. 제 그림이 누군가에게 팔리는 것을 처음 경험했거든요. 그 분 덕에 용기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땅을 통해 어머니와 자연의 원형을 그리다 김 작가는 지금까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마다 엔돌핀이 솟아 나왔다. “제 그림은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 많습니다. 캔버스는 대지이고 나무와 꽃, 길, 호수, 바다 등이 만들어지는데 초기작품에서는 황토를 직접 발라 대지를 표현하기도 했어요. 총천연색으로 대상을 그리던 중 문득 인공적인 색보다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콩껍질이나 호두 같은 자연의 재료를 이용해 작업을 하게되었어요. 캔버스도 돌가루를 뿌려서 거친 느낌을 주었죠. 일기장에 쓴 한글을 배경으로 사용하기도 했어요. 한글서체를 만들었는데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 일반인들은 암호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김 작가의 작품성향도 작업 방식에 따라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초기엔 어머니를 주제로 많이 그렸다면 지금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같이 나를 찾는 작품이 많아요. 실제 아이들과 여행을 많이 하는데 그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2009년 LA에서 약 1개월간 머물며 전시회를 갖는다. 버질아메리카의 초대로 김동석 개인전을 갖게 된 것이었다. “전시기간은 물론 전시가 끝나고도 아이들과 여행을 했어요. 가족과 함께 미국이란 나라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죠.” 여행으로 작가의 시야와 아우라를 넓히다 작가에게 여행은 새로운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작품의 모티브를 얻거나 새로운 소재를 발견하기도 하고 시야가 확대되면서 작품의 성향이 바뀌기도 한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얻는데 그 중 해외에 나가면 자연을 보면서 색에 대한 개념이 바뀌는 경향이 있습니다. 몽고에 갔을 때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을 보고 놀란 적이 있어요.” 그때 작가는 ‘내가 그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2005년부터 내 작품에서 색이 빠져나가기 시작했어요. 화이트와 블랙만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들이 묻는 거에요. “아빠는 화가인데 색을 쓸 줄 모르냐고”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려다가 문득 아이들은 나의 영원한 팬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이들을 위해서 오방색에 해당하는 황(中), 청(東), 백(西), 적(南), 흑(北)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아빠를 진짜 화가로 인정해 주는 것 같아 작가도 기뻤다. 입체적인 작품 속에 세상을 담아내다 작업을 통해 작가의 마음이 드러난다. 그는 작품을 그리는 작가의 혼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작업을 할 때 최선을 다한다. 그렇지 못하면 작품이 제대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작품을 만들었다면 그 다음은 관람객의 몫입니다. 내 품을 벗어난 작품은 나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니까요.” 김동석 작가의 작품은 입체적이다. 화면을 평면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입체를 두고 싶어한다. 그래서 공간을 연결하기도 하고 씨앗을 심기도 한다. 그의 새로운 시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림은 힐링 그 자체니까요. 꿈의 장이고 희망이고 위안이고 위로를 주니까요.” 시간의 흔적을 그리며 행복을 얻다 그에게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만족스러웠을 때는 언제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재미있는 답이 나왔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작품이 나왔을 때 만족감이 가장 큽니다. 신혼 초에 집이 넓지 않아서 방바닥에 작품을 놓고 그리다 잠깐 나갔다 왔는데 처음보는 발자국들이 찍혀 있잖아요. 처음엔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아이들이 건너가다 찍어 놓은 발자국들이었어요. 그 발자국들을 그대로 살려서 작업을 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습니다.” 김동석 작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분명히 1시간 집중했는데 5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리는 경우가 많아요.”라며 털털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서 행복한 사람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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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차의 산실을 복원한 駿惠 송양희 대표
우리 차의 산실을 복원한 駿惠 송양희 대표
[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살던 집과 구 사옥을 차실로 꾸민 주인공이 있다. 바로 준혜 송양희 대표(주)삼양ENP)다. 송 대표는 30년 가까이 차를 마시며 우리 차의 효능과 효과 그리고 다례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전파하기 위해 5개의 차실을 만들었다. 지금부터 송 대표와 함께 차실로 차여행을 떠나보자.관계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차’ “제가 차를 마신 것은 6살 때부터인데 가족전체가 평소 차를 즐겨마셔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본격적으로 차를 배우게 된 것은 21년전 호반회에 가입하면서입니다.”하지만 송 대표가 차를 배우게 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술을 좋아하는 남편(김윤호 삼양에코노지 대표)을 위해서 술 대신 차를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긴 후 남편의 생활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이죠. 체중도 빠지고 더 이상 살이 찌지 않았어요. 우리 차의 놀라운 효과를 경험하고 저희 부부는 더욱 열심히 차를 마시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차실도 자연스럽게 귀빈 접대용과 교육용 그리고 저희 부부가 사용하는 차실로 하나 둘 확장해 간 것입니다.”송 대표의 노력과 차에 대한 관심은 가족 전체를 차인으로 만들었고 최근 결혼한 아들부부를 위해서 차실을 꾸며 줄 정도가 되었다.송 대표가 차를 마시면서 얻게 된 것은 남편의 체중관리와 여러 개의 차실만이 아니다. “차는 우선 관계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요. 친분을 더해주고 차를 나누며 감성공유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주는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차를 통해 치유가 된다는 것이죠. 가정이나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차를 마시면 긴장이 완화되면서 생각이 정리되고 미워하는 감정 등 우리 몸에 해로운 생각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껴요.” 외국인의 눈을 매료시킨 준혜헌(駿惠軒) 송 대표의 호를 따서 만든 준혜헌은 ‘큰 은혜를 알고 실천하는 집’이란 뜻으로 경북대학교 오상룡 박사가 내려준 이름이다. 이곳은 이미 유명 정치인, 기업인, 외국인, 문화 예술인 등이 다녀갈 정도로 유명하다. 특히, 사업 때문에 외국인 바이어들을 초청하는 경우가 많은데 처음 이곳을 찾는 외국인마다 감탄사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춘천의 명소가 되어버린 준혜헌은 송 대표의 30년 차 인생이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준혜헌은 전기를 사용하지 않아요. 태양열과 지열을 이용해서 운영되는 제로 하우스로 전에 살던 가정집을 리모델링 한 것입니다.” 준혜헌에는 차실이 모두 5개가 있다. 주 출입구의 현판과 주련, 붉은 다선문(일심사랑방으로 연결되는 문)과 찻사발이 부조되어 있는 검은 빗돌이 방문자의 눈길을 끈다. 주출입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헌다대가 보인다. 이 집의 중심인 헌다대는 송 대표가 100일 기도를 드릴 정도로 정성을 쏟는 곳이다. 하지만 시간을 정해놓고 하기보다는 시간이 날때마다 수시로 와서 기도를 한다. “처음에는 요일과 시간을 정해 놓고 헌다를 했는데 일을 하면서 큰 어려움이 왔어요. 그래서 지금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에 와서 기도를 드려요.”세심정을 지나면 두 개의 밝은 공간으로 나누어진 최초의 차실이 있고 우측에는 중국식 차실인 입식다례실과 부속 차실이 있다. 특히, 생활차실에서는 기운을 모은다는 탑장과 긴 탁자, 장식장, 팔각상이 있고 베란다를 무대공간으로 꾸며 작은 음악회도 열린다.중국차실로 이어지는 커튼 너머에도 부부전용의 침실 차실이 있고 일심사랑방으로 연결된다. 일심사랑방은 고려시대 북부지방의 사랑방을 차실로 재현한 곳이다. 국내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차실로 꼽힌다. 고려시대 차문화 공간 일심사랑방 부부의 마음이 하나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일심사랑방’은 선조들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던 다용도 공간인 사랑방을 차실로 재현한 것이다.“밥을 해먹고 남은 열로 차를 끓이던, 부엌과 방이 함께 있는 방식을 살리면서 접견실 혹은 대기실을 두어 사랑방 분위기를 연출했어요.”송 대표는 농암 박봉규 장인이 만든 차실 가구 덕에 분위기가 더욱 돋보이는 것 같다면서 다음 장소인 말차방으로 안내했다. 준혜헌에 있는 차실 가구들은 농암이 평생 연구하며 지켜온 14번의 손질을 거친다는 태움질기법으로 만든 목재 가구로 부드러움 질감과 내구성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말차방은 말차를 마실 수 있는 전용 공간으로 봉창, 반침, 이불장 등을 옛 그대로 재현했다. 일심사랑방을 지나 옆 건물로 가면 2층과 3층에 각각 찾자리 교육실과 준혜헌 교육장이 있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신사옥을 짓게되자 구사옥을 차전용 교육장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많은 인원을 교육 할 수 있는 공간이고 이곳에서 아동과 유아를 대상으로 다례교육을 시키고 있어요.” 차 교육과 봉사활동 그리고 환경사업송양희 대표는 한전연구원과 직원으로 만나 사내커플이 되었고 결혼에 골인했다. 그래서 둘사이에는 공통점이 적지않다. 차는 기본이고 환경을 생각하는 에너지에도 관심이 많다. 특히, 2000년 초에 태양광이나 지열을 이용한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뛰어들어 지금은 이 분야에서 꽤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얼마 전부터 해수를 이용한 에너지 연구를 시작했어요. 전국을 무대로 지열공사를 해 주었는데 반응이 좋아요. 저도 자연친화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니까 환경을 지키는데 일조한다는 보람도 있어요. 정부차원에서 환경을 보존하는 일은 게을리 하면 안될 것 같아요.”송 대표는 “원전을 세우거나 유지하는 대신 그 비용을 친환경 재생에너지 개발에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앞으로 우리나라도 신재생에너지를 사용할 날이 올 것이다”고 예상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준혜헌의 계획은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한서대 건강증진대학원에서 차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받았어요. 그리고 한국다도대학원 제19기를 졸업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시간과 돈을 투자해 차를 배운 이유는 그동안 해 온 봉사활동과도 연관이 있어요. 청소년 상담을 20년 이상 해오고 있는데 차 마시는 법을 가르치면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볼 때가 많아요.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그 효과는 큰 것 같아요.” 송 대표는 아이들이 세계인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우리 것을 알고 가야 핳 것 같아서 교육장을 마련했고 다례교육전문가를 양성하고 싶다“고 밝혔다. 송대표는 “학교에서 다례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다구와 다기들을 준비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준혜헌을 찾는 세계인들이 우리 차 문화를 체험하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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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 환우들의 멋진 주치의 ‘노동영 교수’
유방암 환우들의 멋진 주치의 ‘노동영 교수’
유방암 환우들의 모임인 비너스회 창립을 주도하고 현재 서울대병원 유방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는 노동영 교수(서울대 의대 외과학 교실)는 여성암 발생 1위인 유방암 퇴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용장 중 한 명이다. 노 교수를 만나 그의 일상과 취미 그리고 올해 계획 등에 대해서 들어 보았다.“그리그의 피아노 콘체르트를 좋아합니다. 대학 때 프렌츠호른을 배워 약 10년 동안 연주를 했는데 그 영향인지 스케일이 큰 음악이 좋더군요. 지금은 연주보다 서울대 의대 오케스트라 지도 교수로서 대리만족을 하고 있습니다.”연구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무엇이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 노동영교수가 활짝 웃으며 답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7시에 출근해서 비너스 홈피를 관리하고 8시부터 수술과 외래를 보면 금방 점심시간이 된다. 식사가 끝나고 차 한 잔 마시자마자 곧 수술이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의사로서 환자를 돌보는 데 하루 대부분을 보내지만 노동영 교수의 얼굴은 지친 표정이 없다. 오히려 일을 즐긴다고 할 정도로 화색이 돈다. 그의 밝고 긍정적인 사유가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노동영 교수는 유방암 환자들을 떼놓고는 생각 할 수가 없다. 유방암 환자들의 공식 모임이 전혀 없었던 척박한 풍토에서 2000년 12월 유방암 환우들의 모임인 비너스회를 창립했으며 그 후 지금까지 비너스 홈페이지를 통해 환우들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주치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 결과 올해로 7년째가 되는 비너스회 홈페이지에 실린 노 교수의 답변이 무려 10,000건을 돌파했다고 한다.환우들의 모임 비너스회 창립하고 주치의 자청“존스 홉킨스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졸업논문 주제로 내가 답변한 것을 활용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2월에는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으로 책이 나옵니다.”일을 취미처럼 즐기는 노동영 교수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노동영 교수는 우리나라의 유방암발생률이 해마다 늘고 있지만 그에 못잖게 5년이상 생존율도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85%이상 생존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몇 개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과 비교해서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노 교수는 영상수술법을 고안했으며 유전체가 환자의 종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할 계획이다. 그리고 기형단백질을 찾아내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는 국제컨소시엄(15개국 참여)에서 한국 대표 중 한명이다. 한국측 단장은 유명희 박사(KAIST 교수)다. 노동영 교수는 이처럼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는다. 그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환자를 진료하고 매년 700여 명의 환자를 수술한다. 그는 유방암의 세포 및 분자연구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지난 94년부터 SCI 등 세계적 권위지 에 이와 관련된 논문을 100여편 이상 발표했다. 그의 행보는 비단 연구와 수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000년에 유방건강재단을 창립했고, 한국유방암학회 대외협력 및 국제이사 등 대외활동에도 열심이다. 2002년부터는 유방암 계몽 캠페인인 ‘핑크 리본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도 5대 도시(서울, 대전, 광주, 대구, 부산)를 돌며 단축마라톤 대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참여율도 높아서 한 번에 8,000~10,000명이 참여합니다. 개인적으로 큰 보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비록 5km구간이지만 환우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뛰기 때문에 너무 기쁘다고 한다. 클래식 마니아로 10년간 호른연주 해그는 또 2004년 초까지 서울대병원의 의무기록실장을 맡아 ‘전자 의무기록 시스템(EMR)구축의 리더가 되었다. 이처럼 그의 활동분야는 결코 녹록치 않다. 보통사람으로서는 소화하기 힘든 분량이다. 그래서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게 그에겐 야속하기만 하다. 자칫 노동영 교수의 이미지가 무척 건조하게 비쳐질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는 앞서 말했듯이 클래식 마니아로서 전통식을 고집하는 부위기 있는 토종남자이다.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길 줄 아는 신세대 가장의 면모도 고스란히 갖고 있고 컴퓨터도 직접 홈페이지를 관리할 만큼 수준급이다. 노동영 교수는 요리에도 관심이 많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솜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볶음밥과 찌개 종류는 칭찬을 받을 만큼 맛있게 만들 수 있다. 지금처럼 유방암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의 맛있는 요리를 맛보기 힘들겠지만 유방암으로 고생하는 수많은 환우들을 생각할 때 유방암을 정복하는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촬영을 하기에 앞서 유방암과 관련해 노동영 교수에게 궁금한 것 몇 가지를 질문했다.최근 유방암의 발생률이 높아지고 있는데 원인이 무엇입니까? “지난 2001년부터 계속 유방암이 위암과 자궁경부암을 제치고 1위에 올라 있습니다. 유방암의 발병률이 이렇게 높은 이유는 식생활이 점차 서구화되고 있고 생활패턴이 몸을 조금 움직이는 쪽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폐암, 전립선암과 마찬가지로 유방암도 선진국형 암입니다.” 유방암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결혼 뒤 아기를 일찍 낳도록 하며 모유가 좋습니다. 또 매주 3일 이상 한 번에 30분 이상 운동해야 합니다. 미국 암협회에서는 암 예방을 위해 채소를 하루 다섯 접시 이상 먹는 것이 좋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콩을 듬뿍 먹는 것이 좋습니다. 콩은 여성에게 유방암과 함께 골다공증 예방에도 좋은 음식입니다.” 유방암을 조기 진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20세 이상은 매달 자가 진단하고 30대 중반 이후엔 해마다 유방촬영 검사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자가 진단으로 70%이상이 암을 조기 발견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가슴에 멍울이 맺힐 경우 80%는 양성종양이지만 20%는 암이라고 봅니다. 멍울은 더러 겨드랑이에 생기기도 합니다. 한 쪽 유두에서 핏빛 분비물이 나오거나 유두가 갑자기 들어가는 경우, 젖가슴 한쪽이 쑥 들어가는 경우, 양쪽 가슴이 비대칭이 될 때 등에도 유방암을 의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증세가 없는 경우도 있으므로 정기 검사가 필요합니다.” 유방암에 잘 걸리는 사람은 어떤 유형입니까?“고지방 고칼로리의 음식을 섭취하는 사람에게서 잘 생기는데 12세 이전에 초경이 시작되고 55세 이후에 폐경이 된 사람도 잘 걸리며 폐경이후 비만인 사람도 발병률이 높습니다. 출산이 늦거나 아예 아이를 갖지 않는 여성도 잘 걸리죠. 물론 가족력이 있으면 더 조심해야합니다. 서구에서는 50대에 환자가 가장 많은 반면 우리나라는 40대에서 발병률이 가장 높은 것이 특징입니다.”유방암은 완치가 가능합니까?“유방암은 조기에 발견하면 완치가 가능합니다. 유방에만 암이 있을 때엔 10년 생존율이 98%정도이고 주변 조직에만 암이 침범했을 때에도 생존율이 70%를 넘습니다. 그러나 다른 장기로 전이가 시작되면 생존율이 20%대로 떨어집니다. 조기에 암을 발견하면 대부분 가슴을 보존하는 수술을 받을 수 있으며 가슴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아도 유방 성형 수술로 가슴형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조기진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Profile노동영 교수(서울대병원 유방암센터장) 서울대학교 병원 EMR팀장, 의료정보 센터장, 의무기록실장 등을 역임한 바 있으며, 서울대학교암연구소 유방암 연구실장, 한국유방암학회 국제협력이사, 한국 과학기술 한림원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상내역은 지난 93년 미국 NIH의 Fogarty International Fellowship Award를 받았으며, 2001년에는 Oraganon international로부터 ‘젊은 연구자상’을 2005년 6월에는 한국유방암학회 동아학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유방암’ ‘유방암예방 식이요법’ ‘암을 알고 이기는 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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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연을 품은 화가 소정란
[인터뷰] 자연을 품은 화가 소정란
가지 않은 길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라,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의 자취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음으로 해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입니다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 없이 아무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은 채 묻혀 있었습니다. 아, 나는 뒷날을 위해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다른 길에 이어져 끝이 없으므로 내가 다시 여기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위 시는 대부분 한 번쯤 읽어보고 들어봤을 프로스트의 명시 ‘가지 않은 길’이다. 꿈꾸는 소녀처럼 큰 눈을 가진 소정란 작가(서양화가)의 첫번째 개인전(2009.9) 도록 맨 앞장에 이 시가 실려 있다.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첫 눈에도 감성이 풍부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특별히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첫 페이지에 수록한 이유가 있으세요? “네. 개인전을 열기까지 많은 방황을 한 것 같아서요. 결혼 전까지 비록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그림에 대한 애착은 늘 갖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던 터라 내가 할 일이 어쩌면 이 길이 아닌가 생각했었거든요.”소정란 작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커피잔을 들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결혼 후에도 양육에 신경쓰느라 그림 그릴 기회를 잡지 못했어요. 그러다 13년 전 친한 언니의 제안으로 화실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누르고 있었던 그림에 대한 동경과 에너지가 분출되기 시작했죠.” '그랬었다. 오랜시간 정체성을 찾지 못해서 한 때 우울함과 허허로움으로 힘들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으로...붓을 잡고 캔버스를 마주하면서 내게 있어 햇살은 더욱 청아했으며, 살갗에 닿는 바람은 마치 여린 얼굴에 꽃물이 들은 느낌이라고 할까?정말이지 오랜만에 찾아든 설렘이었다. 때론 진한 커피향보다 물감냄새가 그리운 걸 보면...좋은 작품을 만날 때마다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것을 보면...남겨둔 다른 한 길을 기꺼이 찾아듦이 지금의 소중한 오늘이 아닐까 싶다.그대 있음에 진정 나는 행복하다.'작가는 시가 실린 바로 옆 페이지에 위의 문장으로 자신의 재기를 알렸다. 시적 감수성을 겸비한 화가의 시선은 캔버스에서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2002년부터 다시 시작한 그림은 약 7년간의 개인수련을 거쳐 마침내 2009년 화려하게 꽃피웠다.첫 번째 개인전에서 사람들에게 선보인 작품은 한결같이 자연을 담았다. 시골 고향이나 외갓집에 가면 볼 수 있는 황토길, 강가의 풍경, 시골 산길에서 마주치는 소나무, 꽃밭, 가을향이 묻어나는 오솔길, 겨울철 흰 눈으로 하얗게 덮인 농로 등이 작가의 따뜻하고 맑은 시선에 채집되었다. “2008년 국전에서 100호 작품이 입선을 했어요. 그림을 시작하고 6년만의 결실이었어요. 그렇게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어요. 동기부여도 되고 제 속에 에너지도 더 뜨거워지는 것 같고...그래서 더욱 열심히 작품에 집중했어요.”작가는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입선한 다음해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약 3년간 인사동에 있는 화랑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했다.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얻은 게 많아요.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접하면서 그림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어요. 물론 제가 추구하는 작가적 성향도 더욱 뚜렷해졌죠.”작가는 왜 자연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그것도 동물이나 곤충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꽃과 나무, 강과 시골 길 등의 옛 자연풍경이다.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그리고 싶었어요. 어렸을 적 보았던 우리의 아름다운 자연이 점점 도시화되면서 사라지는 게 안타깝고 아쉽더라고요. 지금도 시골에 가면 산길이나 농로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들을 볼 수 있는데 제 눈엔 그게 참 이쁘게 보였어요. 계절에 따라 개울이나 강의 주변이 초록에서 울긋불긋 옷을 갈아입는 것도 그렇고 겨울엔 온통 하얗게 뒤덮이는 산길도 운치가 있고요.”작가의 눈에 비친 시골풍경은 시로 보면 서정시에 가깝다. 자연을 그리는 작가의 태도는 사물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다. 즉 자연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교감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과 교감을 통해 감성이 깊어지면 그때 비로소 캔버스에 자신이 채집한 풍경을 펼쳐 놓는다.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잔잔하고 평화롭다. 울렁거리는 마음도 평온해진다. 미술치료가 절로 되는 느낌이 든다. “성격은 그렇지 못한데 작업을 할 때는 거의 몰입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머릿속에 있는 구도와 장면이 작업이 끝날 때까지 각인된 상태로 남아 있어요.” 작가는 “앞으로 묘사에서 그치는 게 아니고 새로운 터치와 반구상적인 작업을 하고 싶다”면서 “쉽지 않겠지만 풀어야 할 숙제로 생각한다”고 주문을 외우듯 말한다. 자신을 화가로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도록 이끌어준 분은 김성호 선생님이다. 그의 ‘새벽’이란 작품을 좋아한다는 작가는 “네 번째 개인전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새로운 구도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지금까지 사용한 유화 대신 아크릴작업도 할 생각이다. 그녀는 평소 음악과 책을 자주 접하면서 인문학적 소양도 쌓고 골프와 산책으로 체력도 기른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작품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어떻게 작업을 하는지와 이제 막 그림에 입문한 후배주부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청했다. “창작은 대부분 산책 중에 마음에 드는 풍경이 나타나면 사진을 찍고 그중 가장 잘 나온 것을 선택해서 스케치를 하고 채색을 해요. 저와 비슷한 길을 걷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은 크게 생각나는 게 없는데...저 같은 경우 전시회에 자주 가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보는 편이에요. 성향이나 주제 등이 다르기 때문에 무척 흥미로워요.”그녀는 작품의 폭을 넓혀주는데 타 장르의 지식이나 참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임태경의 크로스오버를 좋아하고 시집을 즐겨 읽는 편이죠. 타 장르의 정서가 작품을 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가능하다면 시간을 내서라도 찾아다녀야 할 부분이죠.”소정란 작가는 앞으로 예쁜 모습으로 살고 싶다면서 거기에는 작품이 주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2년 후 네 번째 개인전을 할 것이라면서 보다 편안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내놓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와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생각하고 있어요. 누구나 부담 없이 찾아 올 수 있는 전시회를 기대해 주세요.” 소정란 작가 프로필 개인전 3회단체전 동이7인전(동이갤러리) 단성7인전(단성갤러리) 서울아카데미전(세종문화회관) 아름다운동행전(북부지방검찰청) 대한민국회화제(서울시립미술관) 한국미술협회전(예술의전당) 서울국제미술제(조선일보미술관) 대한민국여성미술제 혜윰전(세종문화회관) 고구려의기상전(조형갤러리)외 다수 수상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2008) 현재 한국미술협회, 서울아카데미, 대한민국회화제 회원, 한국미협서양화2분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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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양화가 조원춘 “여행 하면서 세상의 풍경을 담아요”
[인터뷰] 서양화가 조원춘 “여행 하면서 세상의 풍경을 담아요”
글/최치선 사진/정대일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프리다 칼로, 케테 콜비츠, 파울라 모더존-베커, 나혜석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눈치 빠른 독자들은 첫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바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류화가라는 것. 태어난 때와 나라는 다르지만 이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색으로 세상을 풍자했고 작품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내는데 성공했다. 이 달에 소개하는 조원춘(56) 작가 역시 여류화가다. 조 화가는 여행을 통해 세상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그녀를 만나기 전 한국미술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김동석 화가(동양화)에게 인터뷰를 위해 괜찮은 여류화가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김 사무국장은 며칠 후 조원춘 화가를 추천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조 화가는 때묻지 않은 순수함과 도회적인 느낌이 공존하는 분위기를 가진 여성이었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을 했다. 이유는 이름 있는 작가들이 많은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작품을 본 후 결정하자고 설득을 했다. 잠시 후 그녀가 카톡으로 보내온 이국적인 풍경들은 유명 화가들을 잊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색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강한 느낌의 원색이지만 들떠 보이지 않았다. 물론 손바닥보다 작은 화면으로 본 그림만 가지고 작품을 알아보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첫 느낌은 괜찮았다. 조 화가에게 전화를 해서 인터뷰 시간을 잡았다. 그녀의 작업실은 강동구에 있는 자택이었다. “여류화가의 작업실은 어떤 풍경일까?”그녀를 만나기 전 가졌던 호기심이었다. 그동안 취재했던 작가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그래서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약간의 긴장감도 생겼다. 벨을 누르고 인터폰을 통해 확인절차를 거쳐 조 화가의 작업실로 올라갔다. 반갑게 맞아주는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식탁에 앉았다. 화가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내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벽에 걸린 그녀의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은 거실에서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다. 식탁 뒤 한쪽 벽면에는 제법 큰 부조가 붙어 있었다. ‘저건 무엇일까?’ 궁금증을 풀기위해 다가갔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벽에 붙어 있던 것은 수십 아니 수백 개의 마그네틱 기념품이었다. “여행을 좋아해서 시간이 될 때마다 해외를 나가요. 관광지보다 현지인들이 많이 다니는 골목노점상이나 작은 기념품 가게에서 저런 마그네틱 기념품을 구입했어요. 여행갈 때마다 하나 둘씩 모았는데 이젠 정말 소중한 보물들이 되었네요.”기념품을 살펴보는 동안 그녀가 말했다. “저 기념품 하나하나에 추억이 묻어 있어요. 다른 것들은 무겁고 부피가 있어서 가지고 다니기에도 불편한데 마그네틱 기념품은 작고 가볍고 무엇보다 독특해서 좋아요. 저에게 여행의 재미와 추억을 동시에 주는 귀한 선물같은 존재들이죠.” 계속해서 기념품 예찬이 이어졌다. 그녀의 말대로 벽에 붙어 있는 기념품들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 기념품 하나하나가 그녀가 여행한 나라와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 같았다. 조 화가는 저 기념품을 통해 여행지에서의 추억과 풍경을 떠올리며 화폭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약 40여개의 나라를 다녀왔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나혜석이 1927년부터 3년간 세계일주를 하며 얻은 영감을 작품에 반영했듯이 조원춘 화가도 이국적인 풍경들을 담아낸다. “저는 주로 여행지에서 본 풍경을 그려요.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소는 뒷골목인데...그렇다고 작품의 배경이 모두 골목은 아니고요. 풍경을 그리지만 하늘은 가능한 노출을 안 시키고 차나 배 등 이동수단을 풍경에서 부각시키려고 해요.” 화가의 설명을 듣고 작품을 보니 단번에 이해가 됐다. 그녀말대로 그림 속에는 하늘이 차지하는 공간은 작았다. 대신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중 하나가 주인공처럼 확 눈에 들어왔다.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였다. 배나 트램 등 움직이는 대중교통이 풍경 속에서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그림 속에 있는 자동차나 배는 저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고 싶은 제 마음을 달리는 자동차나 배에 은유적으로 담아봤어요.”화가는 자신의 마음을 저렇게 이동수단에 투영시켜 여행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화가의 그림그리기는 여행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 올때까지 사진을 찍거나 정물을 감상하듯 오랫동안 주시하는 버릇이 있다. 항상 시간이 쫓기지만 그래도 맘에 드는 풍경이 나타나면 더 많이 집중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그녀가 빼놓지 않고 들리는 곳은 미술관이다. 특히 유럽여행에서는 마음껏 미술관과 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녀가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결혼 후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경북여중과 경북여고를 다니면서 재능있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여동생 역시 그림을 그렸고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미대를 포기하고 가정교육학과를 다녔다. 그 때 참고 숨겼던 그림에 대한 미련은 고스란히 결혼 후 육아를 끝내자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38세 되던 해 동네에서 가까이 지내던 화가지망생 친구들과 함께 미술과외를 받았다. 강사는 미대생이었다. 기초적인 데생부터 시작해 다양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 정도 워밍업을 거쳤다. 그릴수록 그림에 대한 갈증이 심해진 조 화가는 문화센터에 등록해 그림을 배우던 중 노재순 전 한국미협 회장을 만나게 된다. “노재순 회장으로부터 그림을 배우면서 제 실력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그려야겠다는 확신 같은 게 생겼죠. 스승도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고 용기를 줬어요. 저는 문화센터를 다니면서 항상 공부잘하는 학생처럼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했어요. 미리 집에서 작업을 많이 했고 그 결과 실력이 늘었던 거죠. 노 회장은 그런 저를 칭찬했고 나중에는 개인사사까지 해 주셨어요.” 그녀는 당시 스승으로부터 배웠던 시간이 지금의 자신을 만드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정말 열심히 그림에 집중했어요. 대학 때 하지 못한 그림을 다시 하게 되니까 에너지도 많이생기고 자신감도 회복하게 되더군요. 이전보다 실력이 향상된 것 같았어요.”그녀말대로 어릴 때부터 타고난 재능은 스승을 만나면서 마중물이 되어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다. 한국미술대전에서 2회 연속 입선하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에 한계를 느끼는 시간이 찾아왔다. 슬럼프였다. 풍경화를 그리다가 있는 그대로를 담기보다 자신의 느낌을 클로즈업해서 부각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풍경에 있는 대상을 모두 담기보다 특화된 어느 하나를 담아내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단순화시켜야 했다. 그런데 그 작업이 쉽지 않았다. 단순화시켜서 반복하는 작업을 계속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 사이 완성된 작품을 놓고 질문을 던진다. ‘어디에서 실수한 것일까? 무엇을 빠뜨린 것일까?’ 그녀는 이 의문점을 풀기위해 더 많이 여행하면서 유명 미술관에서 세계적인 화가들의 작품을 보았다. 아직까지는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했으나 그녀의 의지는 곧 정답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여행담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갔다. 서둘러 몇가지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나 전시회는 무엇이냐고 하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2011년에 대구 대백프라자(2011:mother&daughters전(대백프라자)4인전)에서 했던 4인전이에요. 어머니의 팔순을 기념해 세딸이 마련한 전시회였는데 지금도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찌나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지 전시회 내내 저와 자매들이 감사했어요.”어머니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그녀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녀가 결혼 후 뒤늦게 그림을 다시 그리면서 어느날 어머니 정태연 여사에게도 그림을 그려보시라 권했던 것이다.“그렇게 시작한 어머니의 그림이 어느새 저보다 훨씬 좋은 작품으로 세상에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딸들이 다 모였을 때 팔순잔치말고 더 뜻깊은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어머니를 위한 전시회를 해드리자고 뜻을 모았어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어요.”그녀의 기획으로 탄생한 4인전은 대구와 경북에서 화제가 되었다. 어머니 정태연, 첫째딸 조원춘, 둘째 조원지, 셋째 조원정 등 세 딸과 어머니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전시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족이 모두 화가인데다 작품의 개성도 뚜렷해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던 전시회였다. “연세가 있으셔서 여행을 마음대로 다닐 수 없게 된 어머니께 제가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을 드렸어요. 어머니는 제 사진을 보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더해 작품을 완성했던 것이죠. 저보다 훨씬 색이나 구도가 좋아요.”조 화가는 어머니가 일찍 그림을 배우셨다면 지금쯤 꽤 유명한 여류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그녀에게 자신처럼 결혼 후 뒤늦게 그림을 시작하는 후배들을 위해 한마디 조언을 부탁했다.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무엇보다 자존감은 그림을 그리는데 꼭 필요한 에너지거든요. 그리고 자기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저처럼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거든요. 그때마다 ‘그림은 나를 발전시킨다’고 주문을 외우면 극복이 가능해요. 끝으로 최선을 다해야 해요. 그래야 좋은 결과물도 나오고 희망이 생겨요.”그녀는 앞으로 3년 후에 개인전을 할 계획이다.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여행도 다니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있다. 그녀가 인터뷰를 끝내고 촬영을 하는 동안 작업실에 놓여 있는 작품들을 천천히 감상했다. 이탈리아의 곤돌라, 프랑스남부의 어느 골목길풍경, 에펠탑이 보이는 도로위 자동차들, 그리스의 항구 등 이국적인 풍경들을 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다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나혜석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순간 파리풍경, 스페인풍경, 스페인해수욕장, 만주봉천풍경 등 나혜석이 세계일주를 하면서 그렸던 작품들이 조 화가의 그림에 오버랩 되었다. 작업실을 나오면서 배웅을 하는 그녀에게 이번에 유럽을 가시면 독일이 낳은 서양최초의 여류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의 좋은 기운을 받아 오라고 주문했다. 서양화가 조원춘 개인전 및 초대전 2004:세종문화회관 2008:동이갤러리 2008:setec 2009:see&sea (부산) 2010:이윤수갤러리 2011:mother&daughters전(대백프라자)4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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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최은선 작가...그림과 그림책에서 행복 찾는 영원한 피터팬
[인터뷰]최은선 작가...그림과 그림책에서 행복 찾는 영원한 피터팬
(최은선 작가 프로필) 2009년 SI그림책학교 졸업 2010년 영국 캠브리지 Anglia Ruskin University 교류전 2011년 KT&G 상상마당 외벽 및 내부 sign 디자인 2011년 KT&G 상상마당 라이브홀 벽면 일러스트 디자인 2011년 KT&G 상상마당 디자인 스퀘어 초대 개인전 'MAMA' 2011년 인천 시민문화 예술센터 레지던시 작가 선정 2011년 갤러리 some 초대 개인전 'MAMA' 2013년 CJ 2014년 캘린더 일러스트 작업 2014년 갤러리 다락 초대 개인전 '달:사랑의 기억' 2014년 갤러리 다락 초대 그룹전 '오너먼트' 2014년 디자이너 슈즈 SYNN 콜라보레이션 작가 선정 인터뷰 “괜찮아요. 부담 갖지 마시라고 저도 늦어드릴게요. 기다리시는 동안 맥주 두 병은 마셔야 해요. 저도 이미 두 병을 마셨으니까요.”인터뷰 시간을 맞추지 못해 미리 30분쯤 늦을 것 같다고 보낸 문자에 대한 답이었다. 나는 홍대근처 악어라는 카페에서 그녀의 지시대로 맥주를 시켜놓고 페이스 북에 있는 ‘최은선’이란 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특별한 정보라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뒤져보았지만 공개된 사진첩에는 필요한 정보가 없었다. 머리카락을 내린 채 웅크리고 있는 모습, 패턴인형, 전시회, 고양이, 작업 장면, 웃고 있는 모습, 공항 게이트 등등...맥주를 마시면서 다시 한 번 스마트 폰에 찍힌 문자를 들여다보았다. 웃음이 나왔다. 롱보드라거 두 병을 마신다고 취하진 않지만 갑자기 취중토크가 될 것 같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다려졌다. 재밌거나 개성이 강하거나 아니면 시크한 성격일지 모른다는 나름의 추리를 해 보았다. 그렇게 혼자서 그녀와의 인터뷰 준비를 하는 동안 맥주 두 병은 비어졌다. 시간을 보니 카페에 도착한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못 오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와의 만남이 싫어서 안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 때 스마트 폰의 녹색 점멸등이 깜빡거렸다. ‘작가’로부터 문자가 온 것이다. “지금 가고 있는데 헤매고 있어요. 하지만 찾아갈게요.” 왠지 이번 인터뷰는 재밌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여유를 갖고 기다리기로 했다.“천천히 오세요. 작가님” 혼자 있기가 뭐해 술을 더 시킬까 하다가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주인여자에게 입구 쪽 벽면에 그려진 귀여운 핑크색 악어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저 그림 혹시 직접 그리셨나요?”왠지 그림을 그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인은 웃으면서 손사래를 친다. “아니에요. 친구가 그려주었어요.”뒤에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주인은 옥상인 듯한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한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직감적으로 그녀가 닉네임 ‘타투’ 임을 알았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캐주얼차림에 머리는 단발이었고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테를 꼈는데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여기 앉을까요? 아니면 위로 올라갈까요? 춥지 않다면 옥상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그녀가 자리에 앉으려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살짝 웃으면서 올라가자고 한다. 옥상에는 이미 상당수 손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늘이 보이는 테라스같이 제법 운치가 있는 장소였다. 유럽의 어느 카페 같기도 한 그곳에서 그녀와의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자리에 앉아서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혹시 해리포터 닮았다는 말 안 들으셨나요? 너무 똑같아요.”말을 하고 보니 초면에 실수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됐다. 해리포터는 남자고 내 앞에 있는 작가는 여자가 아닌가. 눈치를 보는데 앞에 앉은 ‘작가’는 반응이 없다. 혼자서 괜한 걱정을 했나보다. 밤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인터뷰하기 위해 몇 개의 질문을 준비했다. 먼저 그녀의 일상이 궁금했다. 작업에 쏟는 시간은 하루 중 얼마나 될까? “작업은 깨어 있을 때 해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부터 새벽 5시~6시까지 하는 것 같아요. 그러고 자기 시작하면 보통 11시나 12시쯤 일어나죠. 그래서 늘 잠이 부족해요. 일은 오후 4시부터 저녁 10시. 손님이 많으면 11시에서 12시까지 하게 되죠.”심플하다. 일하고 작업하고 자고 그게 전부. 어떤 작업을 하는지 들어 보았다. “아직은 찾아가는 여정에 있어 제대로 된 답을 해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 현재까지는 제 안의 색과 소리와 이미지의 세부를 기하학적인 커다란 틀 안에 쏟아내 보기도 하고, 틀을 거두어 세부의 흐름을 풀어 놓아보기도 합니다. 때론, 쏟아놓는 바닥이 캔버스가 되기도 하고, 유리창이 되기도 하고, 커다란 건물의 외벽이기도 하고, 손바닥만한 인형이 되기도 해요. 실험의 과정에 있어서 추구하는 작품의 성향을 특정하기는 어려우나, 현재는 세부의 묘사가 강한 라인 드로잉 작품 위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만든 작품을 스마트 폰에서 꺼내 보여준다. 잘은 모르겠으나 클림트를 닮았다. 자세히 보니 피카소가 중년에 만난 마리 테레즈의 풍만한 모습이 살짝 보이기도 하다. 작가는 어떤 동기로 그림을 시작했을까?“어릴 적 취미였던 인형 만드는 재주를 눈여겨 본 먼 친척 언니가 그림책 편집자로 일하고 계셨고, 그 언니의 권유로 아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던 20대 초반에 첫 그림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첫 책을 하며 스스로의 무모함과 무능력으로 인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힘들게 했음을 깨닫고, 공부할 길을 찾던 중, 사진을 접하게 되었고, 지인의 권유로 공연 사진 찍는 일을 시작하여 업으로 삼다가 10년이란 먼 길을 돌아 뒤늦게 최미란 작가께서 운영하시는 CM그림책 학교와 미대에 들어갔어요. 그림은 그림책 학교 입학을 계기로 시작하였고 동기는 딱히 없으나, 굳이 찾자면 머릿속에서만 머물다 사라지는 상상과 삶을 살며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감정들을 마음의 이미지와 시적인 언어로 노래하는 그림책이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았어요. 물론,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 위로받았던 것은 저였으며, 그때도 지금도 그림과 그림책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이 연유가 동기이자 목적이며, 삶의 이유입니다.”부러웠다. 행복을 찾고 있다는 그 말이 나에겐 무척 낯설게 다가왔다. 나도 오랫동안 찾아본 행복이지만 결국 매너리즘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작가’는 왠지 그 행복을 찾을 것 같았다. 곧....... 그녀가 원하는 행복을 찾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감사할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떤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았을까?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배움과 실력이 많이 부족하여 좋아하는 작가로 답을 하겠습니다. 영국의 그림책 작가인 존 버닝햄과 앤서니 브라운, 스웨덴의 마티아스 어덜순을 좋아하며, 프랑스 작가 니키 드 생팔 ( Niki de Saint Phalle)도 매력적입니다.”예상이 빗나갔다. 적어도 구스타프 클림트가 나올 줄 알았는데...그녀를 만나기 전에 좀 더 그림책 공부를 하고 왔어야 했다. 안이했던 준비가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발코니 같은 카페의 분위기 탓에 어색함이 조금은 감추어진다는 사실. 마지막 잔을 부딪치며 기억에 남는 작품과 전시회에 대해서 부탁했다. “아끼는 작품은 1TH_개인전 ‘Mama’ 중 ‘Mama:엄마가 나보다 어렸던 그때_29’ 유년 시절, 엄마에 대한 기억과 엄마가 부재했던 시간의 상상을 인형으로 풀어낸 전시가 첫 개인전이었습니다. 위의 작업이 시작이자 대표작품 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작업으로, 이 작업을 하며 엄마에 대한 제 감정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것이 그 이유입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유년의 불행을 누구나 어렵지 않게 겪을 수 있는 경험쯤으로 치부하고 스스로의 상처를 회피해오다 어렸을 때는 너무 일찍 늙어버린 아이로, 커서는 영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아이로 살아가고 있는 자아를 이 작업을 통해 깨달았지요. 그 깨달음의 첫 걸음인 작업이라 가장 애착이 많이 갑니다.”‘작가’와의 인터뷰는 여기서 끝났다. 그녀가 나를 향해 애매모호한 미소를 짓고 홀연히 사라진 후 나는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에 부스러기처럼 남은 여운을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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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명다기 품평회 '대상' 수상자 장상철 사기장
전국 명다기 품평회 '대상' 수상자 장상철 사기장
‘청암요’의 장상철 사기장(49)은 ‘제6회 대한민국 올해의 명다기(名茶器) 품평대회’에 ‘귀얄사발’을 출품해 대상과 입선을 차지했다. 故 신정희 사기장의 사돈이자 제자인 장상철 사기장은 전남 해남이 고향으로 “이번 대회를 통해 전국의 훌륭한 사기장들과 함께 좋은 작품들을 많이 감상하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을 가지게 됐다” 며 “앞으로도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힐링을 얻고 행복해 질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고 밝혔다. 수상 후 경남 양산 하북에 머물고 있는 장상철 사기장에게 전화 인터뷰를 요청해 사발에 대한 얘기를 들어 보았다. 사발 하나로 한국을 알린 사기장사발은 우리 선조들이 예부터 밥, 차, 제사상에 사용되던 평범한 생활 용기였는데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 웅천도요지의 도공들과 그 가족들 125명이 퇴각하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면서 가마터의 불이 꺼졌고, 그 명맥마저 중단되었다. 그리고 일제 때 조선 땅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사발마저 일본으로 가져가면서 국보급 사발들은 전부 일본인의 차지가 되었다. “그렇습니다. 일본인들이 수차례의 침략을 통해 우리의 찻사발을 가져다가 예술품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그 결과 거꾸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 오는 형국이 되었지요.” 정상철 사기장은 “우리 선조들의 사발 제조기법이 일제 때 많이 무너진 게 사실이고 반대로 일본은 우리 것을 가져가 일본의 색깔과 모양으로 재탄생시켰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그 격차가 확연히 좁혀졌음을 일본이 인정하고 나섰다.고 신정희 선생은 임진 난 때 도요토미가 최상의 찻사발로 극찬한 이도다완을 국내 최초로 재현해 냈다. 그 뒤를 이어 선생의 수제자인 장상철 사기장은 지난 2010년 일본작가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일본 교토의 노무라미술관 초청을 받아 우리 사발 60여 점을 선보이는 첫 전시회를 가졌었다. 당시 6일간 열린 이 전시회 기간 매일 100여 명 이상의 현지인들이 그의 작품을 감상하러 몰려든 기록을 세우며 미술관 최고책임자인 타니 아키라 관장의 권유로 가장 인기를 끈 작품인 ‛통사발’ 의 영구전시까지 이뤄지면서 ‛사발 하나로 한국을 알린 사기장’ 이라는 칭호까지 생겨났다. 예술품으로 오래 남으려면 景致가 있어야 한다일본인들이 극찬하고 올해 대상까지 거머쥔 사발은 어떻게 만들까? “15년간 선생님께 흙과 온도(불)를 전체적으로 배웠습니다. 사발의 종류는 크게 웅천사발, 기안사발, 귀얄사발이 있습니다. 작가마다 좋아하는 흙이 다르기 때문에 사발 또한 다릅니다. 저는 귀얄사발을 주로 작업하는 데 특징은 철분이 많은 흙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흙이 준비되면 머릿속에 그린 사발을 잘 뽑아낸 후 가마에 구워야 하는데 이때가 가장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사발은 한마디로 불의 예술입니다. 그곳은 인간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 곳이죠. 그래서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여름에는 중성이상의 불로 겨울에는 이보다 센불을 유지하며 굽게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초콜릿 색으로 온도가 중간보다 높을 때 나타나는 색입니다.” 장상철 사기장은 “힘든 과정을 구워낸 사발 중 하나도 건지지 못할 때가 많다”면서 “사발이 하나의 예술품으로 오랫동안 남으려면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 사기장은 또 “도예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위해 도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경제적인 지원도 없고 판로도 없는 사발 작업을 평생 하기란 어려운 게 현실이다”고 털어놓으며 “정부나 지자체에서 반짝 이벤트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우리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과 투자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릇에 대한 예의가 국격을 높인다사발 작업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작업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아 스승님에 대한 부담감이 크다. 지원도 전무해서 살아남으려면 돈 되는 것들을 우선 만들어 팔고 그 다음 예술작업을 해야 하는 실정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지원은 놀라울 뿐이다. 또다른 고충은 도시에서는 작업자체를 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가마를 땔 때 나는 연기는 혐오시설로 오해를 사기 일쑤다. 그때마다 시골로 시골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다보면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어진다. 일본은 우리의 사발을 가져다가 큰 획을 그었다.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세계도자사전에 일본이름으로 사발을 등록했다. 뒤늦게 정부가 나섰지만 결과는 좋지 않다. 일본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사발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도예가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사발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한다. 사발은 반드시 두 손으로 잡아야 하고 차를 따르는 법도 예법에 맞게 해야 한다. 그런 기본이 지켜지면 자연스럽게 외국인들이 보는 눈도 달라질 것이다. 작품을 통해 행복해할 때 힐링된다 장상철 사기장은 불가마에서 원하는 작품이 나왔을 때 소년처럼 들뜨고 즐거워진다. 보통 한번에 30~40개가 들어가는데 나올 때 마음에 드는 작품은 잘해야 1점이다. 그것도 운이 좋을 때 그렇다. 그런데 최근 매우 좋은 작품이 딱 1점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많은 사람한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운반 중 깨지고 말아 너무나 아쉽고 속상했다. 지금은 다시 좋은 사발을 통해 기쁨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 그릇을 일반인들이 사용하면서 행복해하고 감사 인사를 전해 오거나 전화로 재주문을 할 때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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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世薰 詩人]“시인으로 살아온 반세기 감사하고 행복”
[申世薰 詩人]“시인으로 살아온 반세기 감사하고 행복”
제14회 청마문학상 수상자 신세훈 시인한국문단의 대들보 같은 존재이면서 남북 통일문학의 선구자인 아산(我山) 신세훈 시인(73)을 서울 남산한옥마을에서 만났다. 시인은 지난 4월 심사위원단 만장일치로 올해 청마문학상 본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시상식을 앞두고 만난 자리에서 뒤늦게 “축하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꼭 받고 싶은 상이었는데 이렇게 이루게 되어 기분이 좋습니다.“라고 웃으며 답한다. 햇살이 제법 뜨겁게 느껴지는 날씨 탓에 촬영이 힘들지 않을까 살짝 걱정도 되었는데 시인의 미소가 그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시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움에 도전 하는 에너지원 선생은 중앙대 연극영화과 재학시절, 22세인 1962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 당선으로 시단에 나왔다. 당선시 ‘강과 바람과 해바라기와 나’는 당시 심사위원인 무애 양주동, 목월 박영종 으로부터 ‘한국문학의 획을 그을 문재’라는 극찬을 받게 한 작품이었다. 그 후 51년의 시간이 지났다. 말 그대로 반세기가 흐른 것이다. 인간의 기대수명이 늘어 100세라 해도 50년은 쉬이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궁금했다. 선생에게 시는 무엇이고 50년 넘게 시인으로 살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그동안 경제가 안 되는 일을 해 오며 살았습니다. 1991년부터 발행한 계간 자유문학을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내 왔으며, 2010년엔 반 년간 문예지 민족시학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매번 적자를 보고 있지만 내가 숨 쉬는 공간 속에서 벗을 삼은지 오래되었어요. 시인이 된 후 시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지금까지 시인으로 사는 것이고 앞으로도 시인으로 살 것입니다.”선생은 시의 힘으로 경제가 안 되는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그만큼 선생에게 시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움에 도전 하는 에너지원이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시인으로 지내 온 것에 감사하고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비록 돈은 되지 않았지만 멋진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순리대로 물 흐르듯 그렇게 사는 게 마음 편하지 않을까요?”30년 간 차 마셔 건강 유지, 녹차의 카데킨 면역력 강화시인으로서 소회를 묻자 처음과 같은 답을 주는 선생의 얼굴은 소년처럼 맑은 모습이다. 고희가 넘어서도 깨끗한 피부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좋아하는 일을 하고 건강한 생각과 차를 가까이 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루 일과는 아침 8시부터 시작됩니다. 일어나면 먼저 기체조로 몸을 풀고 가벼운 식사를 해요. 11시쯤 사무실로 출근해서 업무를 보기 시작하는데 보통 8시에서 일이 많으면 저녁 10시까지 하는 편입니다. 퇴근이 늦는 경우가 많아 자기 전에 꼭 저녁을 먹습니다. 그래서 잠은 보통 새벽 2시가 돼야 잡니다.”피부가 좋은 이유는 30년 동안 차를 마셔서 그렇다고 한다. 정식으로 차를 배운 게 1984년이라고 하니 올해로 서른 해가 되는 셈이다. 차를 마시는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차례’라고 한다. 일본은 ‘다도’ 중국은 ‘다법’으로 부른다. 선생은 예가 도나 법보다 위에 있다.“당시 차 마시는 것은 대중화 되지 않았습니다. 고작 커피정도였는데 나는 차가 입에 맞았어요. 녹차, 보이차, 홍차, 감잎차, 대추차 등 다양한 차들이 있지만 그중 최고의 차는 녹차입니다. 매일같이 녹차를 마시면 카데킨이라는 항산화제가 암예방은 물론 면역력이 증가되어 감기도 안 걸리고 알레르기도 진정 시킬 수 있습니다. 특히, 혓바늘이나 생인손 등을 앓을 때 녹차를 지속적으로 바르면 증상을 완화시키거나 낫는 경우가 많아요.”녹차는 토마토, 브로콜리, 마늘 등과 함께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세계 10대 건강식품’에 속할 만큼 우리 몸에 이로운 물질이 많다. 선생은 매일 물대신 이런 녹차를 수시로 마시는데 그 때문에 암도 극복하고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몇 해전 일입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외부 모임이 많아 외식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왔던 모양입니다. 건강검진을 받는데 의사가 정밀검사를 받자고 그래요. 갑상선 암이 의심된다는 거죠. 검사결과 다행히 초기였어요.” 선생은 암 진단을 받은 후 항암치료 대신 자신만의 비법으로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의사가 꿈인 적이 있어요. 그래서 평소에도 동의보감 같은 의학관련 책들도 많이 보았어요. 그런데 갑상선 암 진단을 받자 처음엔 덜컥했지요. 그 때 갑자기 머릿속에 있던 민간요법들이 떠오른 겁니다. 집에 가서 아내한테 커다란 찜통을 내달라고 했어요. 거기에 상황버섯과 인진쑥, 녹차, 양파, 마늘 등 온갖 채와 약재를 넣었어요. 먹다 남은 야채의 뿌리도 넣어서 매일 수시로 마셨습니다. 큰 컵으로 가득 따라서 물대신 그렇게 달인 것을 3개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었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왔어요.”정기검진을 받으러 간 병원에서 의사가 깜짝 놀란 것이었다. 갑상선 암세포가 다 사라졌다는 말을 하며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면서 어디서 치료를 받았냐고 물었어요. 나는 그냥 웃기만 했습니다. 의사한테 내가 처방한 민간요법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두었어요.”그렇게 암을 치료한 선생은 지금도 녹차를 마시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민조시 개척, 우리문학의 뿌리 찾기 관심 커 후학 양성 50년 문단활동을 하며 선생이 해 온 일은 시만 쓴 게 아니었다. 앞서 얘기한대로 경제가 안되는 문예지 2개를 발행하고 있으며 장편수필, 청소년시, 청소년 소설, 청소년 희곡, 민조시 등을 개척했다. 그 중 민조시의 경우 3,4,5,6조 운율에 맞춰 쓴 우리가락이다. 선생의 입을 통해 민조시가 무엇인지 들어보았다.“내가 민조시를 처음 쓴 것은 1976년 10월 14일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3·4·5·6조 1·2·3’연작 3편 민조시를 같은 날 한꺼번에 쓴 것입니다. 그 후 24년 만인 2000년 6월에 민조시집 ‘3·4·5·6조’(도서출판 천산) 가 처음 나왔고, 2008년 3월 두 번째 민조시집 ‘통일꽃 핀다’, 2012년 9월 제3민조시집 ‘천부경 나라’를 펴냈습니다. 내가 민조시에 빠진 이유는 대학 때부터 우리문학의 뿌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조시는 한마디로 우리민족의 장단가락입니다. 그것은 이미 농악의 4물놀이와 대중가요의 트롯까지 아우릅니다. 우리가 아는 시조 역시 초장·중장·종장, 3장 6구 12음보로 나눠져 있지만 결국 형식과 내용은 3·4·5·6조입니다. 그런 구조가 예부터 내려오던 소리 장단가락, 무용의 춤사위 등에 응용되었습니다. 왜 그러면 우리 민족이 3박, 3을 중요시했으냐, 이게 역학과 관계가 있습니다. 3·4·5·6조가 바로 1·3·5·7·9의 기본 홀수의 수리, 천부경에 보면 1은 3하고 같은 개념(1=3=天地人=○△□=우주=3재·3신사상)입니다. 3이 곧 6이 되고, 3X3=9가 되고. 9X9=81이 되고, 또 ‘天符經’은 81자인데 곱하기, 나누기, 더하기, 빼기가 모두 천부경안에 들어있습니다. 우리 인류의 수리학과 철학은 우리 조선 동이족의 선조들이 다 해놓은 것입니다.” 선생이 말하는 민조시는 '한 사상'이 배경이다. 한은 일반에 알려졌듯 슬프고, 괴롭고 그런 게 아니다"면서 "크다, 많다, 하나다, 으뜸이다, 우두머리다, 한울타리다라는 뜻이다. 선생은 순우리말도 '한하게'(많이) 만들었다. '풀머리/깨어있는/동녘산자락 청시울가에,/홀로/나/잠드네,/달머리/잠빛 밝은/서녘강허리 금물목샅에./나 홀로/눈뜨네.' 이 민조시에서 풀머리, 청시울가, 달머리, 잠빛 등 시어를 만들었다. '살섞는다'는 말도 처음 사용한 것이다.선생은 문학(민조시)을 통해서 잃어버린 우리민족의 뿌리를 되찾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100편이 넘는 민조시 관련 이론을 발표했고, 직접 민조시 분야를 개설해 현재 70명의 후학들이 활동하고 있다. 반년간지 민조시학도 꾸준히 발행하고 있다. 머잖아 이 분야가 새롭게 주목을 받으며 크게 발전할 것으로 예상한다. 버킷리스트는 문학관 건립과 몽골, 인도, 천산 여행...선생은 중앙대 연극영화과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왜 국문과가 아닌 연영과를 택한 것일까?“시인이 되기 위해 일부러 연영과에 들어갔어요. 연영과를 택한 것은 연극과 시가 하나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연극이 곧 시니까요. 세익스피어와 고전시학은 물론 나중에 내 시의 토대가 된 몽타주기법이나 오버랩 등 영화편집기법 등을 배웠습니다. 심상운 씨하고 중대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썼는데 이 때 국문과인 심상운 씨를 따라 국문과 강의를 많이 들었어요. 신청 할 수 없는 것은 도강도 많이 하고 그랬습니다.” 선생은 시인이 아니었다면 아마 정치가나 군인의 길을 걸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고 시인의 길을 걷고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끝으로 지금 버킷리스트를 만든다면 무엇인 있을지 궁금했다. “먼저 그동안 하지 못한 문학 관련 도서 3만 5천권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고향 시골학교의 폐교를 구입해서 아산 문학관과 시인학교를 설립하고 민조시 문학연구회 같은 연구시설도 갖추고 싶어요. 두 번째는 못 가본 세계를 여행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부회장과 한국문협 이사장을 하면서 세계시인대회 참석차 많은 나라를 다녀봤지만 아직 몽골과 중국 천산(곤륜산), 인도 등은 가지 못했어요.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꼭 가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행하면서 쓴 시가 많은데 책으로 엮지 못한 게 많아요. 주로 기행시인데 대부분 장시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끝으로 그동안 반세기를 살아오면서 남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도움 받은 것에 대해 갚을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빚을 갚고 싶습니다.“ 멋진인생은 물처럼 욕심없이 순리대로 사는 것촬영이 끝나고 한옥마을을 내려오면서 선생은 멋지게 사는 인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욕심없이 순리대로 사는 것이라고 답한다. “가는 사람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았어요. 때로는 배신하는 사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오면 반겨주고 또 떠나면 보내주고 그렇게 물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바위를 만나면 물이 돌아서 가듯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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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박사 원정혜, 평범하지 않은 인터뷰
요가박사 원정혜, 평범하지 않은 인터뷰
그녀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를 달리는 프로였다. 요가 전도사 또는 수행자로서 원 박사는 19세 때부터 요가를 시작해 지금까지 17년째 외길을 걷고 있는 기인이다. 원박사를 대뜸 기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의 삶 자체가 평범과는 거리가 있어서다. 이제부터 원정혜라는 주인공이 요가에 빠져들게 된 경위와 그의 평범하지 않은 라이프스타일을 직접 들어보도록 하자. 출발전 수세미가 된 머릿속017-209-**** 뚜뚜... 통화중이다. 다시 한 번 번호를 확인하고 엄지에 힘을 실어 꾹꾹 눌렀다. 이번엔 신호가 길게 간다. 요즘 흔한 컬러링도 아니고 그냥 일반신호음이다. 요가와 관련된 신비한 음악소리를 기대했는데 조금 실망스러운 느낌이 잠깐 동안 스쳐지나갔다. 무뚝뚝한 기계음은 오랫동안 귀를 간지럽게 하더니 곧 녹음된 여자의 안내멘트가 나왔다. 동시에 폴더를 닫았다. 순간적으로 녹음을 할까 생각했지만 문자를 남기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박사님. 4월호 커버스토리때문에 연락드립니다. 전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몇 번의 수정 끝에 겨우 글자수를 맞춰서 보내고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던 휘파람 소리는 쉽게 울리지 않았다. 다른 취재원과 통화를 끝내고 다른 꼭지를 진행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던 중 휴대폰에서 휘파람소리가 터져 나왔다. 혹시...예감은 적중했다. 원정혜 박사였다.휴대폰 속 목소리는 무척 쾌활한 명랑소녀 같았다. 간단히 커버스토리의 컨셉과 진행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난감한 목소리로 완곡하게 거절을 해왔다. 이유는 아침 7시부터 강의를 시작해 저녁까지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것이었다. 설마 매일 그럴까? 다시 한 번 시간을 빼달라고 부탁했다. 겨우 **출판사 기획자와 약속 건을 뒤로하고 인터뷰를 잡을 수 있었다. 원래 커버스토리의 기획의도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따라다니면서 주인공의 하루를 스케치하는 것이었는데...시작하기도 전에 꽝이 되고 말았다. 머릿속이 수세미처럼 엉키고 있었다.요가박사를 만나기 전 준비운동그녀를 만나러 가기 전에 인터넷을 뒤졌다.“요가박사, 요가수행자, 2001년 SBS 오락프로그램 ‘장미의 이름’에서 요가코너 진행자, EBS문화센터 요가강사 및 요가프로그램 MC, 유명대학(고려대, 연세대, 숭실대, 숙명여대, 차병원, 중문의대 등)강사, 유명 문화센터 요가강사, 대기업 초청강사, 요가관련 비디오 및 단행본 저자...등” 원정혜라는 이름을 입력하자 바로 그녀와 관련된 인터뷰, 비디오, 뉴스단신 등 많은 정보가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그중 **잡지와 인터뷰 한 기사를 읽어보았다. 대부분 요가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역시 요가짱이구나. 요가박사 앞에서 요가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어서 요가관련 사이트를 찾아 요가에 대한 기초정보를 살펴보았다.프린트를 해서 보니 재미는 없었지만 아주 조금 요가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요가는 인도에서 약 6천년 전부터 수행자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수행의 방법으로 어원은 결합한다는 뜻의 yuj이며, 의미는 마음을 긴장시켜 어떤 목적에 상응 혹은 합일한다는 것이다. 요가의 수련과정은 소우주인 자신과 대우주의 조화를 위한 정신력 개발과 육체강화가 목적이다. 인체는 앉고, 서고, 눕는 기본 동작만을 충실히 해도 충분한 운동효과를 볼 수 있는데도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해 인체의 수많은 근육중 사용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되고 그것을 반복하다보면 몸의 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어 몸에 이상이 생겨 질병이 발생한다. 요가는 몸의 근육을 골고루 사용해 몸을 부드럽게 만들어 건강을 얻고자 하는 운동이다.’그밖에도 요가에 관한 여러정보들이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녀를 만나려는 목적이 요가강의를 듣기 위한 것이 아니기때문에 요가의 정의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원정혜 박사를 만나다7호선을 타고 숭실대에서 내렸다. 약속장소인 ‘일 보스코’를 찾기 전에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아직 택시를 못 잡아서 마을버스라도 타고 온다고 한다. 천천히 오시라고 말한 후 ‘일 보스코’를 찾아보았다. 사진기자가 “저쪽에 있어요”한다. 노화가 벌써 왔나 왜 내 눈엔 안보이지? 최기자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았다. 생각보다 작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때 아닌 폭설로 인도는 빙판이 되어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일 보스코’를 향해 갔는데 문이 닫혀 있다. 토요일이라 주인이 늦잠을 자나? 아무래도 인터뷰는 다른 장소에서 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침 바로 위에 분위기 좋은 커피숍이 보였다. 아직도 걸어오고 있는 사진기자를 부르러 밖에 나갔는데 그 옆에 키 큰 여자가 함께 있었다. 한눈에 원정혜 박사임을 알 수 있었다.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커피숍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연하게 메이크업을 하고 온 그녀는 나이에 비해서 훨씬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오랜 수련으로 명징한 눈이 인상적이었다. 시종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하는 모습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차를 시키면서 토스트를 부탁했더니 그녀는 여유있게 구워달라고 덧붙였다. 차가 나오는 사이 100년 만의 폭설이 내린 날씨 얘기를 잠깐 나눈 후 약속된 인터뷰 시간이 길지 않아서 준비해 간 질문을 빠르게 풀어놓아야 했다. 먼저 원정혜 박사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물어 보았다.“그 날 일정에 따라서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어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밤11시에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납니다. 기상 후 3시부터 4시까지 명상이나 호흡, 원고 쓰는 일 등 개인적인 시간을 꼭 갖습니다. 정확하게는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하하 죄송해요. 그리고 낮에는 대학강의나 방송, 글쓰는 일, 만남, 언론사 인터뷰 등을 합니다. 특히, 아침강의가 6시부터 있는 날에는 하루 24시간이 너무나 부족해요. 개인적으로 면허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 택시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데 부족한 잠은 주로 차안에서 보충합니다. 일을 할 때는 집중력이 대단한 편이어서 EBS명상의 시간 1개월 치를 하루만에 녹화한 적도 있어요. 물론 감독님께서 후한 점수를 주신 덕분이지만요. 하하” 그녀는 고려대 조치원 분교에서 요가강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매주 수, 목요일을 빼고는 거의 매일 장거리를 뛴다. 하루에 많을 때는 8개 학교의 강의를 나간다는 그녀. 거기에다 단행본 집필, 비디오 제작, 방송 MC, CF촬영 등 많은 일들을 소화해 내는 샘솟는 체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5세부터 발레를 시작했어요. 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때까지 특기생으로 다녔지만 꼭 10등 안에 들었어요. 공부도 잘하고 싶었거든요. 성격이 워낙 아버지를 닮았나 봐요. 완벽하지 않으면 시작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제 가방에는 없는 것이 없었고 애들은 그런 절 만물상이라고 불렀어요. 초․중․고 재학시절 발레와 리듬체조 선수를 했지만 체력은 좋은 편이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대학 때 알게 된 요가를 통해서 지금의 체력이 길러진 것이라고 생각해요.” 원 교수는 어릴 때부터 날씬 했던 것은 아니었다. 발레와 리듬체조 그리고 에어로빅 등으로 가꿔온 몸매였지만 살이 찌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학원을 진학하면서 그녀는 심한 스트레스로 키167cm에 몸무게가 78kg까지 나가게 되었고 이때부터 요가에 더욱 정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요가는 또 다른 세계였고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방학때 해인사와 송광사를 찾아가 매일 일천배를 올린 것도 마음수련을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특히, 박사학위 논문 준비를 위해 해인사를 찾아갔을 때는 매일 3천배를 올렸고 해인사의 원성스님이 머리를 깎으라는 권유를 했을 땐 실제 스님이 되려는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함께 갔던 후배가 집에 연락을 해서 동생(원현성사진작가)이 오지 않았으면 비구니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절에서 내려온 그녀는 요가를 통해 몸무게를 무려 22kg이나 감량하는데 성공했다. 원 교수의 어린시절은 보수적인 집안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다. 아버지 원오재(70)씨는 현재 **기업 대표를 맡고 있으며 어머니 정영자 씨는 전 유니세프 위원이었고 현재 교통심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는 고대를 나왔고 어머니는 숙명여대를 나왔다 두 분 다 정도를 지키는 깐깐한 분이다. 그녀가 대학은 숙대를 나오고 대학원은 고대를 나온 이유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권유에서였다. 세상물정 전혀 모른채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들어와서 그녀는 상당히 많은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 특유의 적극성과 완벽함은 요가를 만나면서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대학에서도 그녀를 인정하게 되었다 25세부터 대학 강단에 선 그녀는 고려대에서 29세 때 요가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녀는 박사학위 취득 후 세상에 요가를 전파하기 위해 요가전도사가 된다.요가 수행시 주의할 점이제부터 원정혜박사의 요가강의가 시작될 참이다. 주의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일반인들이 요가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제 수업에 들어오시는 분 들 중에서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부분이 ”마음이 편해지고 몸의 불편한 부분이 해소되었습니다 하는 것인데요. 이는 요가의 수행이 부자연스러운 일상에서 오는 불편함을 해소시켜주어서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되고 명상과 호흡을 통해서 스스로 마음의 상태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문제점을 인식함으로써 본질적인 평온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사소한 일에서부터 큰일에까지 많은 생각과 판단, 그리고 결정을 하게 되죠, 그러한 과정 중에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상태는 매우 중요한의미를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요가를 통해서 몸과 마음이 정화되면 몸과 마음의 걸림돌이 되는 문제들 또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요가를 하면서 주의할 점은 무엇이며 반드시 지켜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첫째, 요가 다이어트는 최소한 3개월 후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초보자의 경우 몸이 요가에 적응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물론 2주일 만에 5kg이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미국인은 1주일만에 3kg이 빠졌다고 합니다. 공통적으로 고집이 없고 순수한 사람일수록 반응이 빨랐어요. 반응이 늦더라도 조급하게 굴지 말고 자신의 상태를 꾸준히 지켜봐야 합니다. 둘째, 반드시 규치적으로 해야 합니다.셋째, 반드시 공복상태에서 해야 하고, 식후 2~3시간 후일 때가 가장 적당합니다. 목욕한 직후에도 피해야 하며, 요가체조를 하고 난 뒤에도 곧바로 목욕, 세수, 머리감는 일 등은 피해야 합니다.넷째, 에콜스무브먼트나 요가의 체조부분은 혼자서 해도 좋지만 제대로 요가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믿을만한 지도자의 지도를 받도록 합니다. 시중에 나온 책이나 비디오만 믿고 요가를 독학하는 것은 위험합니다.다섯째, 병을 앓은 경험이 있거나 현재 어디가 아픈 곳이 있으면 수련을 받기 전 미리 지도자와 상의 합니다.여섯째, 타인과 경쟁하거나 비교하며 수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수행의 결과도 개인차가 작용합니다. 설령 다른 사람의 진행과정보다 뒤처지더라도 자신의 그릇과 인연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합니다.일곱째, 항상 긍적적으로 생각하고,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합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어지러우면 요가다이어트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정말 요가박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이 배어나는 목소리와 해박한 지식 그리고 건강한 모습을 통해 원정혜 박사에 대한 신뢰감이 형성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 요가의 정신 그녀가 요가를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일까? 다이어트 성공 아니면 요가전도사로서 이 땅에 요가를 널리 알린 것보다 더 구체적인 무엇이 있을 것 같았다.“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구요. 그것을 많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그러한 과정 중에 많은 분들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셨다거나 좋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하겠습니다.”원박사가 요가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다이어트 때문일까?“하하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중고생 때부터 이미 3천배를 엄청했었구요. 지나고 보니 그것도 요가 수행의 일부였어요. 그리고 요가이론이나 실기는 대학에 들어와서 배웠어요. 이곳저곳에서 인연이 되는 선생님들께, 그리고 스님들과 수행자들에게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예뻐지고 살빠지고 건강해진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이렇게 전공까지 하게 되었네요. 박사 논문까지 요가에 관해 쓰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해보니 가장 정확한 전인교육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서요. 다른 어떤 테마를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석 박사 논문을 모두 요가로 쓰게 되었습니다.”이제 그녀의 나이는 37이다. 얼굴은 아직 서른 전후로 밖에 안보이지만 적지 않은 나이다. 어쩌면 화려한 싱글을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그녀에게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일 중 가장 힘든 일과 가장 기뻤던 일을 물어 보았다.“늘 하우스 안의 화초처럼 생활해 오다가 20대 중반이 되어 갑자기 많은 일들을 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살아온 삶에 대한 생각들이 다른 경우 얼마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지를 그 때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느끼게 되었어요. 그래서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처음 알았죠. 헌데 예술작품을 하는 저로서는 그런 맑지 않은 마음이 작품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글과 작품을 위해서 사시촌이 있는 절로 들어간 것이구요. 새벽에 많은 예불과 절을 드리면서 순간...내 몸 하나, 마음 하나도 다스리지 못한 채 무용을 하면서 이렇게 살이 쪄 있고, 행복하고 싶지만 불행으로 있으면서 누가 내 맘에 든다 안든다.....하는 것은 오만함이었구나...나부터 맘에 들고봐야지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몸과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누군가가 맘에 안든다면...나는 스스로 얼마나 맘에 드는 생활을 하고 넘어가고 이해하게 됩니다.그녀는 절에 들어갈 때의 마음이 가장 힘든 때였고 절에서 5년 동안의 수행을 마치고 나올 때의 마음이 가장 기뻤던 때라고 털어 놓았다.그렇게 절에서 요가를 통해 몸과 마음의 정화를 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그녀에게 세상적인 꿈이 있을까? 수행자에게 부귀영화가 어색한 옷이기에 그녀의 답이 궁금했다.“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고 하기 싫다고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인생은 아닌 것 같아요. 앞으로 수행자로서 교육자로서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에 벗어나지 않는 일과 제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굳이 도전이라기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노력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꿈이 아닐까요?”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힘이 있었고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요가전도사로서 이론과 실제뿐 아니라 충분한 자양분을 소유한 그녀는 요가를 배우는 후배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몸과 마음에 대한 중요성과 가치를 인식하고 스스로의 상태를 잘 조절할 수 있는 지혜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아름다움을 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몰랐던 몸과 마음에 대한 걸림을 스스로 인식하고 일상에서 맑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수 있기를 바래요. 그리고 요가를 수행하는 분들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건강해져서 서로에게 사랑과 기쁨을 나누어주고 타인의 기쁨을 함께 하고 타인의 슬픔을 함께 아파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요가의 경전을 얼마나 알고 얼마나 어려운 동작을 얼마나 할수 있는 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늘 수행자와 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요가수행의 길이 아닌가 합니다. 요가를 수십년 했어도 말과 행동이 지저분하고 술과 담배에 능하며 늘 시기질투심에 사로잡혀서 자신만이 정답이라고 자만한다면 그것은 요가를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모두 늘 겸손하게 열심히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스승은 나의 어머니 언제 왔는지 **출판사 기획자 두 명이 뒤쪽 자리에 앉아서 원박사에게 인사를 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 10분. 아무래도 더 이상의 인터뷰는 무리일 듯싶었다. 마무리를 하기 위해 위해서 남은 질문을 서둘렀다. 단답형 질문에 그녀도 분위기를 눈치 채고 짧게 대답해 주었다. 박사님이 존경하는 분(스승)이 있습니까? 있다면 이유는 무엇 입니까? “주변에 좋은 스승님들이 정말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께 좋은 말씀을 듣거나 수행법들을 많이 배웠어요. 지금의 제가 알고 있는 내용들도 모두 그분들 덕분에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온전한 스승님을 찾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절에도 들어가고 많은 분들을 뵈었지만 스승님은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저희 어머니세요. 스님들도 수행하지면서 많이 상담을 하시기에 그런가 보다...라고만 했는데요. 수행중에 오는 걸림돌을 해소 하는데는 어머님의 지혜로움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구요. 어머니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 반정도만해도 저는 성공한 삶이라는 생각을 할만큼 큰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0년이상 청소년가장돕기 장학회를 운영해 오시면서 아이들 마음에 금이 가지 않게 지로로만 주시고 주변분들에게 늘 베푸시고 하시는 모습이나 미국에서도 크게 활동하시면서 늘 겸손하신 모습...가정적으로 내조도 잘하시고 자식들에게도 헌신적이시면서도 당신의 삶을 잃지 않으시는 모습 등...너무나 따라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그녀에게 10년후의 모습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수행자답게 넉넉한 답을 해주었다.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지만 10년후에도 늘 지금 곧 죽음에 직면해도 후회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돈이나 명예나 사물은 왔다가 스쳐가는 것인데 지나치게 얽매이다가 중요한 사람들과 사랑이나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지금의 삶을 그대로 가졌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친 후 그녀는 **출판사 직원들과 앞으로 나올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고 사진기자와 나는 커피숍을 빠져 나왔다. 인도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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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CEO] 김세철 관동대 명지병원장...경쟁력 있는 병원 되려면 고정관념을 깨라
[병원 CEO] 김세철 관동대 명지병원장...경쟁력 있는 병원 되려면 고정관념을 깨라
KBS 건강프로그램 ‘비타민’에서 ‘아들의 성’을 주제로 강연 해 주목 받았던 김세철 관동대 명지병원장(전 중앙대 의료원장)을 만났다. 2009년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의료기관평가에서 우수의료기관에 선정되는 등 흑석동 병원 개원 1년 만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김 원장의 리더십과 병원 경영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서였다.“CEO로 있는 시간 보다 환자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2005년 2월 중앙대 의료원장에 취임한 이후 보수적인 틀을 깨고 과감한 개혁으로 흑자병원을 만든 주인공 김세철 의료원장. 김 원장에게 병원 CEO로서 성공한 비결을 묻자 돌아 온 답이었다. CEO로서 자신을 알리기보다 의사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김 원장의 속내를 알고 더 이상 묻기가 어려웠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일상적인 질문부터 시작했다. 마침 어제 술자리가 있었다고 하기에 주량을 물어보았다.“소주나 독주로 분위기를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십니다. 많이 마시기보다는 즐긴다고 해야죠.” 애주가임이 틀림없었다. 출근부터 퇴근까지의 시간표가 궁금했다.“아무리 술을 마셔도 출근은 언제나 6시 50분입니다. 술은 내 개인적인 부분이지만 출근은 병원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이기 때문에 어긴 적이 없어요.”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슈퍼컴퓨터처럼 김 원장은 스스로 만든 약속과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아침출근 후 7시 20분에 미팅을 합니다. 모든 전공의 선생들이 모여서 수술환자들에 대한 처방과 진료 등에 대해서 의논을 하죠. 8시까지 전체미팅이 끝나고 나면 회진이나 수술을 시작합니다. 외래가 8시 20분부터 시작되죠. 그 후부터는 수술과 연구 그리고 미팅의 연속이죠. 개인적인 시간이라면 아 출근해서 전체미팅 시작 전까지 약 30분이 전부입니다. 그 시간에 하루일과를 체크하고 E-mail을 읽고 답장을 보내죠.”김 원장은 하루일과를 마치 브리핑 하듯 단숨에 말했다. 의료원장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이유를 묻자 답변은 이번에도 단순명쾌했다.“의사가 수술하고 연구하고 환자와 대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까? 그렇다고 내가 의료원장으로서 일을 도외시 하는 것은 없습니다. 결재도 연구실에서 할 수 있고 원고나 논문도 연구실이 편하거든요. 물론 일이 있으면 의료원장실로 올라와서 업무를 봅니다.”거듭 의사의 역할을 강조하는 김 원장에게 이번에는 건강관리의 비결을 물었다. “특별한 것은 없어요. 현재 이렇게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형편이라서 따로 운동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많이 걸으려고 노력합니다. 병원 내에서도 빨리 걷기를 실천하고 있어요.”술을 자주마시면 건강에 해롭지 않냐는 질문에도 김 원장은 주저없이 답변했다. “기왕마시는 술인데 기분 좋게 마시면 스트레스 해소에 좋죠. 자기주량만 지키면 술이 나쁘진 않아요. 물론 너무 자주 과음하면 몸이 감당하지 못하지만...”김세철 의료원장은 술이 독주일수도 약주일수도 있는 것은 전적으로 술 마시는 사람의 몫이라고 강조했다.최근에 김 원장은 재미있는 작업을 의뢰받았다. 전북 고창군에서 복분자가 남성의 정력에 미치는 영향을 증명해 달라는 것이었다.“기존의 실험은 객관성이 결여된 부분이 많았어요. 한마디로 허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할 연구는 ‘복분자를 먹고 오줌을 싸면 요강이 깨진다’는 소문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저도 실험의 결과가 기대되는 작업입니다. 이미 복분자의 효능은 장기복용시 노화억제와 황산화작용으로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졌지만 이번 동물실험을 통해 그것을 입증한다면 임상실험을 거쳐 발표하는 수순을 밟을 것입니다.”김 원장은 그밖에도 이미 3년 전에 보건복지부로부터 연구용역을 받은바 있다. 주제는 “ 환경호르몬이 남성생식기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이다. 김 원장은 올해 이 연구를 마무리하고 발표를 하게 되는 데 결과에 따라서 발표 시기는 늦춰질 수도 있다고 한다.“만약 환경호르몬이 남성 비뇨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연구 결과가 나온다면 파장이 큰 부분인 만큼 발표 시기는 조정 될 것입니다.”김 원장은 올해에만 두 건의 연구를 마무리하게 된다. 대단한 열정이 아니고선 이루기 힘든 결과물이다. 수술과 연구 그리고 크고 작은 회의, 의료원장 업무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난해까지 했던 대한비뇨기과학회 이사장은 차치하더라도 현재 대한성학회 회장, 한국의료QA학회 부회장, 대한병원협회 경영위원장 등의 과외활동까지 합하면 정말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정말 대단하신 열정입니다”고 한마디 하자 김세철 의료원장은 살짝 웃음을 머금으면서 손사래를 친다. “아닙니다. 시간이 너무 없다보니 기대만큼 열심히 하지 못해서 회원들게 죄송합니다. 올해는 회원들이 좀 더 많은 관심을 갖는 학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비뇨기과의 스타교수인 김세철 의료원장은 남성의 생식기와 관련된 연구를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분자를 비롯한 일련의 연구들이 새삼스러운 분야는 아니다. 지난해에는 비아그라를 5년 이상 복용한 발기부전환자 105명과 남편의 비아그라 복용사실을 알고 있는 배우자 3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왜 비아그라를 장기복용하는가?”그리고 “지난 7년 동안 비아그라 부부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조사결과에서 장기 복용시에도 성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6점 만점 기준으로 남성이 5.15점, 여성이 5.10점으로 상당히 높게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실험의 결과를 통해 발기부전치료제를 오랜 기간 복용해 온 남성들은 ‘발기강직도’를, 배우자들은 ‘오르가슴 증가’를 가장 큰 변화로 꼽았다고 한다. 교 오는 2008년 말 완공예정인 신축병동은 약 400병상으로 지상9층 규모의 최첨단 건물이라고 한다. 이렇게까지 중앙대 의료원이 발전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의사로서 그리고 의료원장으로서 충실했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임직원들이 해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의 원칙을 지켰는데 그 결과가 좋게 나타났어요.”하나의 원칙 그게 무엇일까?“그것은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도 예외가 될 수 없었죠. 기존의 보수적인 틀을 과감히 깨고 경쟁력 있는 병원이 되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스타의사 한명보다 젊은 의료진을 많이 키우는 게 환자를 위해서 훨씬 큰 도움이 됩니다.”김 원장은 병원혁신을 통해 개원 1년 만에 병상가동률 95%를 넘기고 이제는 병상이 부족해 새 병동을 짓고 있을 만큼 흑자를 기록했다. 이런 결과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김 원장의 예외 없는 원칙을 적용했기 때문이다.“임상교수가 환자진료 때문에 논문을 쓸 시간이 없다고 하면 환자가 곧 논문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논문과 환자의 치료는 뗄 수 없는 관계라고 강조합니다.”중앙대 병원에서 김세철 의료원장만큼 바쁜 사람이 있을까? 김 원장은 지난해에 SCI에만 다섯편의 논문을 발표했다.김 원장의 이런 부지런함은 그의 몸에 밴 습관에서 나온 것이었다. 연구회 때부터 관여해 온 QA학회 일을 보면서 김 원장은 병원이 환자를 만족시키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고 하루일과를 시작하면서 어떻게 하면 하루를 효율적으로 쓸까 생각했다고 한다.마찬가지로 출장중에도 비행기 내에서 발표할 논문을 점검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발표를 잘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이처럼 그의 QA생활철학은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것은 또 CEO로서 업무를 보는 데 적극 활용되고 있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능력있는 사람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또는 CEO는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등에 대해 매일같이 고민하면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지난 2005년 8월에 세계남성과학회가 열렸어요. 내가 조직위원장을 맡았는데 사무총장과 각 분과위원장에게 진행을 맡겼어요. 일체 간섭하지 않았죠. 나중에 외국의 교수가 그러더군요. ‘이번처럼 깔끔하게 학회가 진행된 적이 없었다. 사소한 다툼도 없이 학회행사가 잘 끝났다. 고맙다.’고 말입니다.”인터뷰의 대미를 장식하는 내용이었다. 김세철 의료원장의 ‘CEO 노하우’는 QA철학에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 효율성과 가치를 생각하는 습관이 중앙대 흑석동 병원을 개원 1년 만에 흑자병원으로 만든 힘의 원천이었다. 김세철 원장은 현재 한국과학기술 한림원 종신회원이며 의학한림원 정회원과 대한성학회 회장 그리고 한국의료QA학회 부회장, 대한병원협회 경영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서울고등법원 조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아들에게 말하는 남자 (2006, 해나무)와 전립선 질환의 모든 것 (1997, 일조각) 등을 펴냈다. 수상내역은 아세아태평양 성기능장애학회 최우수논문상 (1989) 재경 경북대총동창회 자랑스런 동문상 의료부문 (1998) 중앙대학교 학술상 (2000) 미국 포경수술정보교육센터 인권상 (2000) 대한비뇨기과학회 학술상 (2002)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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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관광청 마리콘 바스코-에브론 지사장 인터뷰
필리핀관광청 마리콘 바스코-에브론 지사장 인터뷰
올해는 필리핀과 한국이 수교한지 6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5월엔 3일동안 서울 도심에서 수교 60주년 기념축제가 열려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페스티벌을 주최한 주인공이 바로 필리핀관광청의 마리콘 바스코 에브론 지사장이었다. 에브론 지사장은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할 만큼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얼마 전에는 필리핀관청 주최로 세부-다바오 미디어 팸투어를 개최해 필리핀의 아름다운 휴양지를 한국에 소개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에브론 지사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와 좋아하는 음식 그리고 에브론 지사장이 직접 추천하는 필리핀의 관광지 등을 소개한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한국을 제 2의 고향이라고 할 정도로 사랑한다. 특히, 한국의 사계절을 좋아하는데, 경치가 계절마다 바뀌고 나뭇잎의 색과 식물들이 때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패션과 음식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역동성은 언제나 도전적이며 새로운 것들을 보고 하는 것이 기대가 된다. 한가지 불변하는 것은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은 필리핀인들처럼 따뜻하고 다정하다.한국음식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특히,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김치부터 시작해서 한국의 모든 야채를 좋아한다. 여러 종류의 나물을 좋아하며 집에서 만들어보는 것도 즐긴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시금치를 간단하게 해먹을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불라오와 비슷한 갈비탕과 칼데레타와 비슷한 갈비찜도 좋아한다. 세부와 다바오의 특징은?-세부는 땅과 바다에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다. 또한 희귀 해양 생물이 있는 다이빙 포인트도 있다. 세부는 이제 필리핀으로 가는 제 2의 관문이면서 현대 도시로 거듭났다. 반면 다바오는 정말로 독특한 여행지다. 다바오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필리핀 부족들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바오 사람들은 아직까지 보수적인 편이다. 다바오는 또한 원숭이를 먹고 살아가는 멸종위기의 독수리의 서식지이며 가장 높은 산인, 아포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한국의 관광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자연 그대로의 소박한 분위기가 있는 안동을 좋아한다. 한국 유교의 중심지라고 불릴 만 하다. 산과 계곡은 필리핀과 아주 흡사하며 달콤한 딸기와 고지의 쌀과 야채와 같은 농업 상품은 정말 맛있다. 제주도 또한 기억에 남는다.세부와 다바오의 관광시 주의사항은 무엇인가?-세계 여러 곳에서 모인 여행자들은 그들이 여행 하는 그곳을 중시해야 한다. 우리 문화는 지역마다 다르다. 공통적인 관습이 있는가 하면 수용할 수 없는 관습도 있다. 필리핀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필리핀 사회에서는 가톨릭이 지배적이고 그렇기에 여러 면에서 보수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회나 노인들을 방문할 때에 적절히 옷을 입는 것이 지금과 같은 현대 시대에도 중요하다.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문신 또한 필리핀인들에게는 아직 부정적이다. 보통 문신은 범죄자들이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세부와 다바오의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엇인가? (추천메뉴)-세부의 점심과 다바오의 두리안은 꼭 먹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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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소설가 구효서...“올해 감미로운 멜로소설 쓰고 싶어요“
[인터뷰] 소설가 구효서...“올해 감미로운 멜로소설 쓰고 싶어요“
[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마디’가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한 구효서의 직업은 전업작가다. 그는 등단이래 누구보다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다양한 스펙트럼을 선보이며 자신만의 이력을 쌓아왔다. 중견소설가로서 그의 이름은 어느새 서점가의 브랜드가 되었다. 작가 구효서는 신작을 내놓을 때 마다 서정성과 탄탄한 주제의식, 재미를 겸비한 소설로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 호평을 받아왔다. 쉽게 읽히면서 깊고 다채로운 실험을 통해 새로운 각도에서 사회를 보는 (눈을 가진) 이 시대의 진정한 소설가 구효서 씨를 만났다. 남부터미널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작가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초면이지만 사진으로 많이 보아왔기 때문일까? 커피숍을 찾아 걸어가는 동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단정한 외모 탓에 샐러리맨으로 보이지만 평범함 속에 감추어진 아우라가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보여줄 것 같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궁금증의 진원지를 찾아보고 싶었다. 비록 한정된 시간과 인터뷰라는 형식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먼저 이메일로 보낸 질문지를 중심으로 작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먼저 올 봄에는 단편집이 나옵니다. 그동안 써왔던 단편을 묶어서 창작집 형태로 내고 첫 장편소설을 재출간합니다. 또 지난 12월부터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한 ‘타락’이 7월에 완료되면 멜로소설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작가의 새해계획이다. 많은 작업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직업작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분량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직업으로서 소설가를 택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잡지사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소설만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러 가지 상황이 그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고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직업소설가가 된 후 26년 동안 소설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다행이란 표현은 내게 ‘행복’으로 들렸다. 우리나라에서 시 또는 소설만으로 생활을 할 수 있는 작가는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문단에 나온 후 지금까지 작가는 그의 말대로 많은 소설을 써왔다. 일정한 톤이나 색깔로 예상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쓰기보다 새로운 양식이나 주제로 옷을 바꿔 입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의 신작을 대할 때 마다 신선함을 선물로 받았다. 늘 새로운 도전을 하는 작가 구효서의 스타일은 앞으로도 ‘광대무변’할 것 같은 예감이 들 정도다. 평론가들도 독자들처럼 그의 도전을 신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작품성을 담보한 중견작가의 신선함은 근래에 찾아보기 힘든 모델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력을 봐도 전업작가로서 그가 얼마나 신선함을 견지하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1994년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2005년 「소금가마니」 이효석문학상 수상, 2006년 「명두」 황순원문학상 수상, 2007년 「시계가 걸렸던 자리」 한무숙문학상 수상, 2007년 「조율-피아노 월인천강지곡」 허균문학작가상 수상, 2008년 『나가사키 파파』로 대산문학상을 수상 등 작가로서 그의 행보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이어져 새로운 도전을 한다. 취재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일뿐, 나머지는 작가의 상상력 바로 ‘멜로소설’이다. “멜로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 하자 작가는 소년처럼 웃으면서 “멜로디와 드라마의 합성어”라고 답한다. “멜로소설은 멜로디처럼 감미로운 드라마가 될 겁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오래전 영화화 된 <침향>과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생각났다. 1995년 출간한 ‘낯선 여름’은 이듬해인 96년 홍상수 감독에 의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1996년 출간된 중편소설 「나무남자의 아내」는 김수용 감독의 <침향>으로 각각 스크린에 옮겨졌다. 두 소설이 모두 남녀의 사랑(삼각관계 포함)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멜로적 성격을 갖춘 것이라 작가가 올해 멜로소설에 도전할 것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했다. 좀 더 욕심을 내서 어떤 내용인지 들어보려다 더 이상의 질문은 피했다. 김이 빠지면 안 될 것 같아서다. 대신 소설쓰기에 대해서 화제를 돌렸다. “취재를 하는 경우는 제 소설 ‘동주’(자음과모음 펴냄)처럼 실존인물을 쓸 때 필수입니다. 이미 수많은 작품과 언론보도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그의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죠.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제대로 파악해야 그 틈을 메울 수 있는 상상력이 발휘되니까요.” 소설 ‘동주’을 쓰기 위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교토에서 동주의 행적을 쫓았다. 그리고 작가의 말대로 사실과 사실 사이의 틈을 발견했다. 소설 ‘동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주인공은 윤동주(1917~1945)와 동시대를 산 소녀와 현대의 재일교포 3세로 윤동주가 머물렀던 일본의 아파트에 사는 요코는 윤동주가 경찰에 끌려가는 현장 등을 본, 윤동주를 남몰래 좋아하는 15세 아이누족 소녀입니다. 그리고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현대에 사는 재일교포 3세 김경식은 윤동주 유고 관련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실종된 친구를 찾아 나서는데 그 과정은 곧 윤동주의 유고에 가까이 가는 길이 됩니다. 두 사람이 좇는 윤동주의 길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동주'(자음과모음 펴냄)는 윤동주가 소재지만 주인공은 아니다. 주변 인물의 눈으로 윤동주의 삶과 시의 세계를 살펴본 것이다. 작가는 계속해서 소설쓰기에서 취재는 필수라기보다 선택이라고 얘기한다. “모든 소설이 취재를 필요로 하지는 않아요. 제 경우에는 오히려 앉아서 쓴 소설이 더 많습니다. 연예소설이나 굳이 취재가 필요없는 주제는 상상 속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책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데올로기의 산물, 넌센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도배된 세상에서 독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리고 작가는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한마디로 넌센스입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이데올로기를 조장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는 오히려 책 속에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꼭 책속에만 길이 있습니까? 책 밖에도 길이 얼마든지 있는데요. 종이책을 대신해서 e북이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젊은이들이 책을 멀리하는 것도 문제될 게 없습니다. 아들과의 대화에서 논리정하게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수세에 몰리는 쪽은 나입니다.” 작가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한마디로 독서지상주의사고는 깨져야 한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세상에 대한 경험치는 결코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책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영화와 음악과 여행과 많은 놀이들이 책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책의 지평은 종이만이 아니다. 구 작가는 2000년 e북에 ‘메별’을 연재했다. 이 작품은 이듬해 세계사에서 장편으로 출간됐다. ‘랩소디 인 베를린’ 영화로 만들고 싶어 앞서 언급한 두 소설이 영화화 되었기 때문에 이번엔 작가 스스로 감독이 된다면 어떤 작품을 영화로 만들고 싶은지 물어 보았다. “그런 기회가 온다면 ‘랩소디 인 베를린’입니다. 일단 스케일이 크거든요. 음악을 가미하기 때문에 소설보다 매력적일 것입니다.” 두 천재 음악가의 삶을 그린 장편소설 ‘랩소디 인 베를린’은 18세기 말 독일 바이마르와 평양, 21세기 베를린과 일본과 한국을 잇는 배경 속에서 두 조선인 음악가의 불꽃같은 삶을 그리고 있다. 문학적 덕목은 작가의 언어로 말하는 것구효서 작가는 87년 등단작 ‘마디’이후 지금까지 그는 총 92권의 책을 출간 했다. 작품 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 모두 그의 이름이 나온 책들이다. 26년 결과물인 셈이다. 현재 55세인 그가 앞으로 26년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그동안 써온 작품들이 다 만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개작을 하고 싶기도 하지만 주제나 방향은 지금도 마음에 들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끝으로 그는 작가의 문학적 덕목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작가의 언어가 아닐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각각의 언어가 있다고 생각해요. 미술가, 음악가, 샐러리맨, 공무원, 선생님, 목사님, 정치인 등 저마다 활동하고 있는 세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잖아요. 작가도 마찬가지에요. 책을 통해 자신의 언어가 드러나죠. 그리고 스타들처럼 이미 대중한테 이름이 알려진 작가들은 책 속에서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자신의 언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 언어는 어디에 속할까’ 생각하면 조심스러워집니다.” 작가는 최근 시비가 불거진 작가들의 모습이 일반인들한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다면서 작가의 덕목은 언어에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작가가 정치언어를 쓰면 어떨까요? 논쟁을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하면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문학인이라면 적어도 자신의 언어가 세속적이거나 정치적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비판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 멜로소설에 도전 인터뷰가 끝날 무렵 구 작가는 대뜸 자신의 모습이 소설가 같냐고 묻는다. 이렇게 질문이 많은 인터뷰이는 처음이다. 그런데 질문과 동시에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한다. “전업작가가 된 후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스타일입니다. 9시 출근해서 글을 쓰니까요. 옷은 물론 수염도 깨끗하게 정리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소설가라기보다 회사원으로 봅니다.” 작가의 말에 긴장이 풀어지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는 수년 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교 가 아닌 스터디다. 작가지망생들이 팀을 짜서 그에게 요청하면 응하는 식이다. 하지만 3그룹을 넘기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보통 6명 정도 모인 그룹이 3개 정도 되는데 한 주에 1개의 그룹을 2시간씩 합니다. 그들의 열정을 보면서 내가 얻는 게 많아요.” 그의 마지막 멘트 속에 열정이 강조된 것을 보면 올해 도전하는 멜로소설은 젊은이들이 읽기에 좋은 작품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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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안영주 대표 '인도 홍보의 마이더스'
[인터뷰] 안영주 대표 '인도 홍보의 마이더스'
한국인 중 90년 이후 지금까지 인도를 가장 많이 다녀 온 사람은 누구일까? 이렇게 질문하면 쉽게 답을 내리기 힘들 것이다. 그동안 인도를 여행한 한국인들이 무척 많아졌기 때문이다. 인도관광청 한국사무소의 발표에 의하면 93년 인도를 방문한 한국인은 2만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1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과 인도의 거리가 많이 짧아진 것 같다. 이렇게 인도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많아진 이유는 누군가 인도에 대해 오랫동안 체계적인 홍보를 해왔음이 분명하다.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정답을 공개한다. 주인공은 바로 안영주 BLS서비스코리아 대표이다. 안 대표는 지난해까지 인도관광청 한국사무소를 20년 가까이 이끌어 오면서 한국에 인도를 소개하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프로모션을 추진하는 등 한국과 인도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 온 홍보대사이다. 안 대표만큼 공식적으로 인도를 많이 왕래한 한국인은 드물 것이다. Special 인터뷰의 문을 여는 인물로 안영주 대표를 만나보았다. (다음은 안영주 대표와의 일문일답 전문) 인도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인도의 캐치프레이즈는 잘 알려져 있듯이 Incredible India입니다. 다양한 문화와 음식, 종교와 풍습, 그리고 역사가 공존하고 있어 한가지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매력을 지닌 나라입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인도라고 표현할 수 있겠죠. 인도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종교, 문화, 관습, 정치 등 천 가지의 모습을 지닌 나라에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또 즐기고 배우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넓은 나라에서 넓게 생각을 하는 진정한 여행자로서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인도는 성자부터 가난한 이까지 모두가 공존하는 세계입니다. 인도에서 꼭 봐야 할 곳과 음식 그리고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인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지마할을 비롯해 아그라 성, 아잔타 석굴, 카주라 호 등 28개의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합니다. 인도음식은 지방마다 특색 있는 다양한 음식을 주식으로 합니다. 북인도는 밀가루로 만든 로티(차파티, 난)가 남인도나 벵골에서는 쌀이 주식입니다. 각 지방의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 좋겠죠. 그리고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에서 현지인처럼 목욕의식을 행하는 것은 어떨까요? 인도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니까요. 인도의 어떤 점이 매력적입니까?인도에는 세계인을 사로잡는 타지마할이나 사르나트 같은 유명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1억이 넘는 인도인구 중에서 무려 3억이 영어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글로벌 기업이 많은 인도는 경제 활성화에 주력하는 등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하지요. 이제는 관광시장 뿐만 아니라 발전하는 경제로 인해 비즈니스나 유학을 하기 좋은 곳으로도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인도여행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인도를 굳이 오랫동안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인도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는 여행지 입니다. 가난하지만 바삐 일하며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사는 현지인들의 모습 때문 아닐까 합니다. 외국인이라고 형식적 여행만을 하지 말고, 현지인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현지 문화와 음식 등을 즐기려 노력한다면 인도는 아마 여행객들의 마음속에 평생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만들어 줄 것 입니다. 인도를 여행하는 한국여행자들의 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습니까? 증가추이는 어느 정도 입니까? 인도를 여행하는 한국여행객은 해마다 상당한 수로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특히 5년 동안 매년 큰 증가율을 기록해 2008년 대비 2011년에는 30%가 넘는 증가율을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높은 증가율로 한국인들이 인도여행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표님과 인도의 인연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1993년, 대전엑스포 인도 파빌리온을 시작으로 한국에 인도를 알리고 홍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2만 명 안팎이던 한국인 방문객이 현재는 1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증가한 것을 보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인도인들이 좋아하는 인사말이나 행동은 무엇입니까? 양손을 모아 고개를 약간 숙이며 나마스떼라고 하는 인사말을 좋아합니다. 또한 인도에서는 상대방의 발등에 손을 얹고 자신의 이마를 대는 인사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최고의 존경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인도인들이 매우 좋아하는 인사표현입니다. 인도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인도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지리적 다양성을 갖고 있는 것 외에도 수많은 외래문화가 지역전통 문화와 결합되어 생겨난 문화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각 지역을 방문하면서 지역적 특성을 충분히 경험하고 온다면 값진 여행이 될 것입니다. 보통의 인도인들은 한국을 어떻게 알고 있나요? 인도 사람들은 한국인에 대한 배려가 높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전세계에 불고 있는 한류바람이 인도 내에도 영향을 미쳐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대장금이 방영되어 5%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한국가요를 듣는 젊은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2008년 한국관광공사 뉴델리 지사가 개소한 이래로 많은 인도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인도관광청이 하는 일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인도관광청은 인도의 다양한 관광지역을 홍보하는 것은 물론 인도 내의 숨겨진 지역을 한국인들에게 소개하고 더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내의 다양한 지역을 찾아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마케팅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또한 미디어를 비롯해 인도영화, 공연, 음식등과 관련된 프로모션을 기획, 후원하고 로드쇼, 세미나, 워크샵, 국제전시 등을 통해 한국인에게 더 친근한 인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도여행 전 관광청을 방문하면 어떤 점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요? 인도 여행계획을 하고 계신 분이라면 관광청 홍보사무소를 방문해 안내책자를 받아가실 수 있습니다. 또 관광청 홈페이지를 통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인도여행에 대한 준비 및 현지정보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여행 전 관광청 홈페이지를 꼭 방문하시기를 추천합니다. 현재 운영중인 BLS는 어떤 일을 하는 곳입니까? 인도비자발급을 대행해 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사람이 인도를 가기위해서는 비자가 꼭 필요합니다. 하루든지 한달이든지간에 인도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비자가 있어야합니다. 가장 많이 받으시는 비자는 관광(Tourist)비자입니다. BLS SERVICE KOREA는 여권 및 비자신청/발급 업무를 처리하는 글로벌 비자 서비스대행업체인 BLS INTERNATIONAL SERVICES의 한국지사로 지난해 11월 3일부터 인도비자접수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인도비자접수센터 업무시간은 비자신청 9:00~12:30, 수령 4:30~5:30이며 발급은 2박3일정도 소요됩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안영주 대표는 사진 촬영에 앞서 센터를 안내하며 비자발급 외에 다양한 서비스들을 설명해 주었다. 이 곳에서는 신청자들의 편의를 위해 택배, SMS, 복사 및 프린팅, 여권사진서비스 등을 실시하고 인도관련 무료책자와 지도 등 인도여행에 필요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여행사와 일반 신청자들을 위해 1시간 무료주차서비스와 여권 취급을 위해 강화된 보안서비스를 유지하고 있다. 인도비자접수센터는 앞으로도 신청자들의 편의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BLS 사무실 위치는 용산구 한남동 258 현대리버티 하우스 2층 202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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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배낭 여행자여 초심을 잃지 말고 속단하지 말자"
[인터뷰] "배낭 여행자여 초심을 잃지 말고 속단하지 말자"
울룰루의 일출. 사진:강혜진상품이 아닌 여행자가 주인공인 자유여행 문화 정착을 위해 트래블아이는 창간과 함께 세계일주배틀 100탄을 기획했습니다. 이는 해외여행의 기회 확대와 여행을 통한 자기혁명은 물론 세계와의 소통을 사훈으로 삼은 본지의 실천의지 입니다. 세계일주배틀은 지난해 <제1탄 인도를 내품에> (2010.9.6~2010.11.5)에 이어 올해 <제2탄 호주를 내품에> (2011.7.8~2011.8.13)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세계일주배틀 대상의 영예는 강혜진(성균관대 철학과 2학년) 학생이 차지했으며 35일간의 호주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강혜진 학생은 또 이번 여행에서 미션(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쳐라!)까지 성공시켜 사이판 4박5일 상품권도 받게 되었습니다. 세계일주배틀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주)하이호주와 중화항공 그리고 (주)KT&트래블, (주)나라셀라, (주)탑항공, (주)삼성출판사, (주)스코노코리아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트래블아이는 올해가 가기전 세계일주배틀 제3탄을 준비합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해외여행의 기회를 가질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일환으로 오는 9월 중 트래블아이가 놀라운 변신을 합니다.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아래에 이번 배틀 대상 수상자인 강혜진 학생의 일문일답 인터뷰를 게재 합니다. 그녀는 대학 입학 후 처음 맞은 방학 때부터 인도와 스페인 등 유럽을 유랑하며 배낭여행의 깊은 맛에 흠뻑 빠진 열혈 여행낭자 입니다. 9월부터 그녀의 즐거운 호주배낭여행기가 연재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따뜻한 시선으로 열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대상 수상자인 강혜진 학생. 1.이번 여행 중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결국 마인드컨트롤 이었다. 삼십일이 넘는 여행을 '장기'라고 말붙이기에는 민망한 구석이 있지만 한 달부터 시작되는 장기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여행을 마음먹었을 때와 준비할 때, 떠날 때의 그 마음을 잃지 않고 전진해 나가는 마음인 것 같다. 한순간 모든 것이 지겨워질 때도 있고, 완전한 신선함에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해서 후회할 때도 있었다. 이 모든 순간,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를 다스리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2.호주 여행전과 여행후의 느낌은 어떤 차이가 있었나? 조금은 당연한 이야기인 듯 하지만, 이번 여행이 나로 하여금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확신하는 버릇을 버리게 해주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고질병이기도 한데, 무엇을 일찍 단언하고 정의 내려서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아주 작은 것을 확신하는 순간, 모든 것이 줄어들어 버리는 세상이니까! 사막 투어에서 보게 되는 낙타의 모습. 3. 여행 중 아쉬웠던 점은? 준비기간이 충분하지 못해서 현지에 가서 우왕좌왕했던 순간들이 아쉽다. 불충분한 준비가 오히려 예상외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마음의 불안감마저 잠식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호주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동물 '캥거루' 4.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몇 가지 장면들이 스치지만, 단연 울룰루 캠핑에서 부쉬 캠핑을 하면서 침낭에 누워서 밤하늘을 볼 때가 정말 기억에 남는다.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온갖 벌레소리, 그리고 별똥별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이던 밤을 잊을 수 없다. 5. 호주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속단하지 말아야 할 땅. 6. 앞으로 호주배낭을 하려는 여행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여행을 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35일 동안 호주 전역을 여행한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모두들 신기해했다. 호주에는 생각보다 자유배낭여행객들이 그리 많지 않다. 물론 휴가기간 동안 여행을 즐기는 자들이 상당수이긴 하지만 워킹비자를 통해서 호주에서 번 돈으로 호주여행을 즐기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US달러의 환율을 뛰어넘은 콧대 높은 호주물가에 단단히 마음 준비할 것. 그리고, 시중에 출판된 가이드북을 너무 신봉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많은 정보들이 기재되어있지만, 개인 적으로는 유럽보다 소스가 적어서인지 정보의 객관성이 종종 결여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또한 몇몇 도시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할 것을 추천한다. 호주에는 코끝이 시리는 겨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옛 얘기 또한 4 seasons 1 day 의 날씨를 보여주는 맬버른까지. 자칫 잘못된 날씨정보로 여행전체를 망칠 수도 있으니, 여러 종류의 옷을 단단히 챙길 것. 시드니의 대표적인 명소이자 세계유산인 오페라하우스의 전경. 사진: 강혜진 7. 배낭여행을 통해 얻은 점과 앞으로의 배낭여행지는? 호주에서 수많은 지구방랑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돈과 시간에 얽매이지않고 발닫는 곳은 어디든 떠나는 여행자들에게 깊이 감명 받았다. 호주의 여행 이후 놀라운 자연경관이 주는 경이로움에 대한 갈증이 증가 하게 되었다. 따라서 위대한 건축물과 거대한 도시보다는 도심의 반대편에 있는 인적이 닿지 않은 여행지로 떠나고 싶다. 가령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대자연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나의 다음 여행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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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하이호주 김효철 대표 시드니 현지 인터뷰
[호주] 하이호주 김효철 대표 시드니 현지 인터뷰
[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지난 3월 서울에 입성한 ‘하이호주’가 주목받고 있다. 영원한 파라다이스 ‘호주’의 현지 여행사로 자리 잡은 ‘하이호주’ 마침내 서울에도 지사를 내고 본격 가동에 들어간 것이다. 19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20년 동안 시드니에서 한국과 외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여행 업무를 해 온 ‘하이호주’가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을 듣기 위해 하이호주의 김효철 대표를 시드니 본사에서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먼저 호주 현지 여행사인 ‘하이호주’가 서울에 둥지를 튼 이유가 궁금했다. 김 대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 20년 가까이 호주현지 여행사로 관광 업무를 해 왔지만 최근 경기 악화로 현지 랜드사들의 폐점 사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이호주 역시 영향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에 직접 사무실을 개설해 운영키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서울법인은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부분이라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호주 현지 업체간 신뢰와 네트워크 강점김 대표의 마지막 언급이 또 다시 꼬리를 물게 했다. 그렇다면 서울입성을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습니다. 호주 현지에서 한국인을 비롯해 외국인을 상대로 20년 이상 영업을 하다 보니 고객의 니즈가 무엇인지 어떤 대응과 적합한 여행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특히, 한국 여행자들의 경우엔 다양한 여행 패턴을 소화해야 만족도가 크기 때문에 ‘하이호주’만의 노하우가 축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서울사무소는 준비했던 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오픈 시기가 맞아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하이호주가 자랑하는 역량과 노하우는 무엇일까 궁금증이 밀려왔다. 김 대표에게 무리한 부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보고 싶었다. “특별히 노하우라고 할 것은 없지만 하이호주만의 강점은 오랫동안 호주에서 현지 업체들과 교류를 하다 보니 상호 간 믿음이 커진 것과 다양한 회사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여행자들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김 대표의 말대로라면 하이호주는 한국인들의 입맛에 딱 맞는 숙소, 관광지, 수상레저, 골프 등 다양한 일정을 맞출 수 있고 비용 또한 한국여행사들보다 저렴하게 책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상품을 무조건 싸게 할 수는 없지만 일정부분 합리적인 가격으로 여행자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특히, 시드니와 케언즈의 데이투어는 가격과 컨텐츠, 서비스 등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제 서울에서 원스톱으로 호주일정을 케어 해 드리기 때문에 여행자들의 불편함은 최소화 되리라 생각합니다.” 김효철 대표는 고객에게 신뢰받는 여행사를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여행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하이호주가 현재 가장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는 상품은 무엇일까? “개인과 가족 등 상황에 맞는 상품들이 있기에 몇 개만을 소개하기가 어렵네요. 대표적인 상품은 시간이 없는 가족이나 연인들끼리 자유일정을 선호하는 여행일 경우 시드니를 중심으로 1박2일부터 4박6일, 5박7일 등 다양한 상품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시드니 시내투어는 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해 하버브리지 등의 주요명소를 둘러볼 수 있도록 구성했으며, 근교로 나가면 블루마운틴과 포트스테판, 골드코스트, 울릉공 등을 관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시간과 가격 모두 절약할 수 있는 상품입니다.” 여행가이드와 여행플래너의 역할 충실하이호주는 시드니 외에도 케언즈에 지사를 두고 있다. 케언즈 역시 시드니 못지않게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지역 중 하나인데 하이호주의 차별화된 무기는 무엇일까? "무기하니까 갑자기 무섭네요. (웃음) 하이호주는 말씀하신대로 시드니에 이어 케언즈에 지사를 두고 투자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케언즈는 세계최대의 쿠란다 열대우림과 세계유산인 그레이트 베리어리프가 있는 곳입니다. 수상 스포츠와 액티비티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유도 세계에서 가장 큰 산호초와 너무나 아름다운 바다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혼부부들에게 인기가 많은 케언즈는 도시가 크지 않아 휴양과 관광을 모두 잡을 수 있다. 게다가 하이호주만의 특화된 갱쟁력으로 저렴한 가격에 멋진 리조트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며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는 게 가능하다. 하이호주의 장점은 호주를 여행하려는 모든 여행자들에게 친절한 여행 안내자이면서 여행경비를 가장 합리적으로 짜주는 여행 플래너의 역할까지 훌륭하게 완수 한다는 것이다. 하이호주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까지 좋은 일만 있었을까? 호기심은 다시 하이호주의 성공비결에서 위기관리와 극복으로 옮겨갔다. 자칫 방송프로를 흉내 내는 것은 아닐까 우려되었으나 이미 활시위는 당겨졌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호주 현지인들에게 신뢰를 얻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어요. 호주인들은 정직한 사람에게는 무한한 호의를 갖고 대하지만 조금이라도 거짓이 드러나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업상 하는 작은 거짓도 나중에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부터 철저히 오픈하게 되었어요. 덕분에 지금은 거래처로부터 무조건 신뢰를 얻었고 지금의 하이호주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울에서는 어떨까? 정직이란 기본은 유지하더라도 방법까지 같을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사업은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하이호주는 여행상품보다 여행자가 소중합니다. 따라서 여행자 위주의 상품을 준비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진이 거의 남지 않아도 여행자가 필요하다면 섭외를 합니다. 대부분의 상품이 여행자의 동선과 편의를 고려해 만들어졌습니다.” 여행자 위주의 상품 판매해 긍정의 피드백 받는 여행사 목표김 대표는 언제부터 여행업에 발을 들여 놨을까? “젊었을 때 20대부터 가이드를 했습니다.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현지 가이드를 하다보니 욕심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하이호주를 차렸습니다. 회사를 설립하고도 가이드가 좋아서 오랫동안 사장업무와 병행했어요. 지금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신규 사업으로 시간이 없어서 가이드 업무를 못하고 있습니다.” 여행의 꽃인 가이드를 천직으로 생각한다는 김 대표는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갈 생각이다. 하이호주의 토대가 굳건한 이유는 바로 현장에서 오랫동안 여행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이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일어서기 전에 앞으로 ‘하이호주’를 어떤 여행사로 키울 계획인지 들어 보았다.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여행자 위주의 여행상품을 팔고 싶습니다. 나아가 여행자들로부터 피드백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돌아가서 입소문을 낼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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